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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텔레비전마저도 동네에 한두 대밖에 없던 시절, 삼류 유랑극단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 약을 팔기 전에 검은 망토를 두른 이수일과 입술을 빨갛게 칠한 심순애가 등장하는 어설픈 신파극을 보여줬다. 그것도 재미있다고 밤마다 동네 사람들은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부리나케 공터로 몰려나왔다. 초등학교 때 살던 소도시에서는 여름이면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서커스단이 들어왔는데, 그곳을 지날 때면 말똥 냄새가 났다. 그 서커스단 구경 값이 꽤 되어서 말을 타고 뭘 하는지 끝내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 서커스는 명절 때마다 방송에서 보여준 외국 서커스단의 묘기였다. 공중그네를 타고 날아다니거나, 장대 꼭대기에서 끈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거나, 채찍으로 호랑이를 고양이 다루듯 하는 것을 어찌나 많이 봤는지 지금도 실제로 서커스단을 구경한 것처럼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나라 서커스단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동춘 서커스단 사진집을 통해서였다. 그 책에 담긴 사진에는 무대에 나서서 온갖 기이한 재주를 부리는 모습이 아니라 서커스 단원들의 무대 뒤 삶이 담겨져 있었다.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하는 어린 단원들과 화장하는 중국 기예단 소녀들의 모습은 생경했다. 카메라 렌즈는 서커스단 깊숙이 들어가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적은 짧은 글은 진솔했다. 마치 서커스단원 중 한 사람이 사진을 찍고 글을 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사진집을 낸 작가는 서커스에 매료되어 카메라를 들고 서커스단을 따라다녔다는 여학생이었다. 그는 몇 년 동안 서커스단을 사진에 담느라 학교도 그만뒀다고 했다. 그의 열정이 궁금했다. 출판사에 문의해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는 외국에서 사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두어 번 메일을 주고받은 뒤 내가 보낸 책에 그는 피아노 연주가 담긴 시디를 답으로 보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라고 했다. 서커스 공연장 매각을 반대하며 천막 꼭대기에 올라가 농성하는 이의 기사를 보면서 그가 떠올랐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으려나. 그나저나 날 추운데 고공 농성하는 이는 괜찮으려나.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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