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른 아침, 청량리에서 강릉으로 가는 기차 안이 소란스러웠다. 강릉에 놀러 가는 노인들이 서울을 벗어나기도 전에 벌써 술판을 벌였다. 아마도 아침 대신 막걸리 한 잔씩 나눠 먹는 모양이었다. 노인들은 오랜만에 기차 여행을 하는 흥까지 더해져 목소리가 커졌다. 기차는 녹음이 짙어진 산을 에둘러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은 고요한데, 차 안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노인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까지 가세했다. 그래도 차마 조용히 하시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옛날 강릉으로 놀러 가던 청년들이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틀고 하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 생각하면서 참는데 결국 차장이 와서 주의를 줬다.

노인들은 미안하다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도란도란 사는 얘기를 했다. 그들 중 몇이 한참 동안 한 사람을 흉봤는데, 그때 굵은 목소리를 가진 분이 느긋하게 말했다.

“젊어서는 안 그랬어. 참, 사람 괜찮았어. 나이 들고 좀 이상해졌는데, 자식들 결혼시키고 혼자 오래 있어서 그럴 거야. 서운한 거 있으면 내가 말해 볼게.”

친구 편을 들어주는 그의 말에 괜히 내 마음이 훈훈해졌다. 기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한참 동안 산길을 달려간 곳에는 전교생이 11명인 중학교가 있었다. 1학년 교실에는 칠판 앞에 달랑 책상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내 같이 학교에 다녔다는 아이들은 마치 형제 같았다. 자신에게 가장 힘이 되는 게 있다면 뭐냐는 질문에 한 아이가 옆에 앉은 친구를 가리켰다.

“친구요.”

말한 아이의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그 아이의 복숭앗빛 얼굴을 보면서 기차 안에서 만난 노인을 떠올렸다. 이 아이는 자라 마음 따뜻한 노인이 될 테고, 아마 그 노인은 어린 시절 이 아이처럼 따뜻하지 않았을까.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돌아오는 길, 아름다운 풍광보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잔상이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험한 뉴스와 천박한 말들이 휩쓰는 세상에서 마음 따뜻한 이들과의 만남은 큰 위안이 되었다. 분명, 세상에는 따뜻한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김해원 | 동화작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