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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종다리’가 지나간 이곳 도쿄는 폭염에 끓고 있다. 나는 한국 기업의 도쿄법인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세 살 때 일본으로 건너 왔다. 대학 1학년 때인 지난해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국비유학생 시험에 운 좋게 합격해 고국의 고려대학교에서 1년간의 짧은 유학생활을 하고 돌아온 지 이제 한 달. 하지만 나의 눈과 귀는 밤낮으로 고국의 소식, 특히 ‘통일뉴스’에 쏠려 있다. 한국전쟁 때 실종됐던 미군의 유해 55구가 북한 원산에서 오산을 거쳐 지난 1일 미국 본토로 송환됐으니, ‘종전선언 협상’이 어떻게 진전될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사실상 중독 상태다. 심한 흥분 상태이기도 하다.

1년 전 서울로 출발할 때는 전쟁터로 떠나는 수준의 각오를 해야 했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강도를 높여가며 주변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일본은 오래전에 잊었던 방공훈련을 실시하는 등 ‘전쟁공포’에 질려 있었다.

서울은 달랐다. 이전 정부에 대한 심판과 과거의 구습을 타파하는 사법적·문화적 절차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홍대앞 밤거리 식당과 주점, 커피숍 등에서 여러 대학에 재학 중인 학도들을 비롯해 수많은 고국의 청년들을 언제나 만날 수 있었던 점이다. 그들은 모든 국가 현안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갖고 있었고, 그에 대한 자신들만의 풍부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들을 수 없는 강의, 발제, 토론이 매일 밤 넘쳐났다. 안암동, 신촌 등지에서도 맛있는 탕수육과 치맥을 곁들인 ‘통일’ ‘남북회담’ 이야기가 밤마다 꽃을 피웠다. 이렇게 높은 정치 참여도는 일찍이 일본의 어느 집단, 사회에서도 경험하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수준이었다. 나는 그 하루하루에 깊이 감사했다. 전쟁의 공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확신에 찬 또래들의 모습에 동화되었다. 그리고 지난겨울, 그들의 분석과 확신은 분명한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로 시작된 남북한 간 접촉은 강원도 평창에서의 놀라운 동계올림픽 개회식 사진들을 예고편으로, 판문점에서의 ‘손을 맞잡은 남북한 지도자의 휴전선 넘기’, 그리고 싱가포르에서의 트럼프와 김정은 간 정상회담 등 숨가쁜 질주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 그리고 남북. 이 국가들에 대해 분명하고 현실적인 분석을 하는 기회가 된 나의 서울 유학은 분명 꿈같은 시간이었다.

유학 중에 통일부 주최로 실시된 콘테스트에서 ‘한국이 통일 역량과 추진력을 유지, 증대하려면 일본을 포함한 지리적 주변 국가와의 긴밀한 협력(북한·중국 모델)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논문으로 우수상을 받은 것도 국제정치학도로서 짜릿한 기억이다. 며칠 전 서울 친구들과의 SNS 대화를 통해 지난 1년간 남북대화를 평가하면서 한 친구가 ‘DRAMATIC’하다고 쓰자마자 다른 친구가 ‘DYNAMIC’이라고 썼다. 그러자 이 ‘DYNAMIC’이라는 표현에 모두가 ‘엄지척’하고 이모티콘을 쐈다. 한국은 변화,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폭발 수준의 ‘재구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나는 대한민국이 나의 조국임을 다시 한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역동성과 단결성을 되새기며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간다. 몸은 도쿄에 있지만 조국의 위대한 미래에 미력한 힘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김우중 | 와세다대 국제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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