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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책 한권을 받았다. 평택 쌍용자동차(쌍차) 공장 굴뚝에서 오늘로 84일째 고공농성 중인 쌍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의 해고일기다.

책 첫머리엔 85호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추천사가 실려 있었다. 추천사를 읽다가 눈과 마음에 오랫동안 머문 글 내용이 있었다.

“어쩌면 저들이 더 절박할 텐데 그러나 난 그걸 애써 외면했다. 한진에 와야 할 관심이 혹여 쌍차로 가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그들보단 우리가 더 절박하다고, 우리를 더 먼저 봐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쌍차를 봐주세요 했던 가증스러움. 인간은 다급하면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란 말, 그래서 찔린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가증스러움과 본성이라는 두 단어의 절묘한 조화였다.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몇 번이고 되뇐 가증스러움이다. 그 절박함에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일까?

따지고 보면 그 절박함 때문에 누군가를 희생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힘드니 도와달라고 아니 내 문제가 더 크니 일단 이것부터 함께해 달라는 것이 정말 가증스러운 것일까? 아니 그게 본성이라면 이해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연신 가증스러움이라는 단어를 입으로 낯설게 옹알거리며 되새기고 있다 보니 2년 전 대한문에서 쌍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모든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사람아, 희망이 되어라” 미사를 225일 동안 봉헌하며 들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잊을 만하면 이따금씩 그리고 지금도 듣는 질문이 있었다. 왜 이리 노동문제에 집착하냐고 말이다. 다른 여타의 사회 현안도 많은데 너무 쌍차에 집중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집착과 집중이라는 말이 이렇게 서글프게 들린 적도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더 이상 죽을 수만은 없어 세상 한복판에서 살겠다는 외침도 하루가 멀다고 얼마나 무자비하게 공권력의 탄압을 받으며 피폐해진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다른 이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내가 너무나 쌍차 해고노동자들에게만 매달리는 가증스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심경이 착잡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심 서운했다.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 의제가 될 만하면 굵직한 정치적 이슈에 떠밀려 그때마다 쌍차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어떻게든 안간힘을 써가며 그들이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아침 해고자들이 공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출처 : 경향DB)


나름 항변해 보았다. 사실 내겐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문제가 너무나 다급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 본성이 드러나 다른 문제들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니 쌍차 문제가 더 절박하니 집중해달라고 부탁하며 기도했던 것이 가증스러움이라면 가증스러움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고통의 상대화이다. 자신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이다. 고통을 상대화하거나 비교한다면 그건 또 다른 폭력이다.

그렇게 비교되는 고통은 이해와 공감보다는 무시된다. 각자 처해진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결코 서로 다를 수 없는 우리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아픔이다. 그런 아픔을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에 집중과 집착이라는 말은 정말 당치 않은 것 같다.

만일 그렇게 바라본다면 나는 오늘도 가증스러움과 다급한 본성이 드러난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매우 이기적인 그런 연대를.

그래도 간절히 부탁하고 싶다.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이름을 불러 그리우면 사랑이고, 그리운 사람 이름을 부르면 사랑고백이라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김정욱 이창근 이 두 사람이 하늘 벼랑 끝 굴뚝의 삶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새봄이 오는 3월14일 토요일 평택 쌍차 공장 굴뚝 앞에서 고통 앞에 중립 없는 뜨거운 연대를 해달라고.


서영섭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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