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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김근태는 1985년 9월 군부독재정권의 혹독한 고문의 여파로 매년 가을이면 고문치레의 병 앓이를 하곤 했다. 결국 그는 군부독재의 전기고문이 있은 지 26년3개월을 견디다 2011년 12월30일 소천(召天)했다. 2010년 여름의 일이다.
김근태는 민청련 후배들과 강원도 홍천군 서석마을 ‘모듈자리’에서 MT 형식의 막걸리 모임에 참석했다. 그날도 김근태 의장의 건강상태가 썩 좋은 것이 아니어서 필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든 자정이 넘은 시각 김 의장을 모시고 서울길을 재촉했다.
늦은 밤, 실개천을 휘돌아 나오는 시골길 주변으로 는개가 차창을 덮치고 초행길의 긴장은 자꾸만 어깨에 힘을 주게 했다. 그때 김 의장이 말했다. “최상명 차 좀 세우지.” 김 의장이 차에서 내렸다. 나도 따라 내렸다. 그런데 김근태 의장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자동차의 시동을 끄고 헤드라이트도 끄라고 했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칠흑 같은 어둠은 순간적으로 공간의 인지능력을 상실시켰다. 이내 김 의장이 하늘을 쳐다보며 외쳤다. “나 김근태다” “내가 김근태다” “세상아 나 김근태라고…”. 그의 외침은 산기슭과 아랫말로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듯했다. 다시금 김 의장의 토로가 이어졌다. 사람들의 이름과 단체의 이름이 연이어지고 있었다. “이근안, 김원치, 서성…” 그리고 “민청련, 전민련, 전대협, 민주당, 한반도재단…” 더 많은 이름과 단체가 밤하늘로 퍼져갔다.
이근안은 1985년 김 의장을 야만적이고 살인적으로 전기고문을 저지른 고문기술자요, 김원치는 민주화 운동단체인 민청련을 탄압하기 위해 용공조작을 기획(2012, 김근태 재심청구서)한 검사, 그리고 서성은 1심 재판장의 이름이다.
하늘을 향하던 김 의장의 시선이 내게로 왔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응답도, 아무런 외침도 같이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의 억눌리고 짓밟힌, 그러나 누구에게도 쉽사리 토로하고 위로받지 못한 영혼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분단반도의 모순과 미완의 민주화, 사상의 자유를 잃은 채 존엄 받지 못한 한 인간이 칠흑 밤하늘 실개천 물소리와 지난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차 안으로 몸을 옮긴 김 의장은 탄식과 한숨을 몰아쳤다. 침묵이 흐르고 깊은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날 김근태는 무엇엔가 가로막혀 맘 편히 말하지 못했던 힘든 감정들을 칠흑 같은 어둠에 흩어 놓았던 것 같다. 그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투사였고 지도자였다.
그러나 정작 김근태는 그가 이룬 민주주의가 아직은 미완의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완의 것과는 타협할 수 없었기에 힘든 몸과 외로운 영혼의 하루하루는 더욱 괴로웠으리라. 그날 내가 그의 위로가 되지 못한 것들에 힘겨워하고 있다. 미망(이루지 못한 희망)이 되어버린 김근태의 희망이 지금도 미망으로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 앞에 난 그저 초라하기만 하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6주기를 맞는 즈음 대한민국은 광화문광장의 수많은 촛불들이 민주주의의 숭고함을 웅변했다. 민주화는 역행하기 힘들다는 정치권의 게으른 인식에서 비롯된 ‘이명박근혜 정권’ 10년의 경험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고 그 피해는 모두 국민들 삶의 몫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국민이 또 일어서 민주주의를 증명했다.
오늘 우리는 촛불의 힘에 무임승차하고 시대적 소명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되돌아보아야 한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해맑은 웃음의 기억과 마주하는 양심이 되려면 말이다. 역사이행의 한순간도 긴장을 놓아서는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다. 시대의 부름에 기성의 것과 타협하지 않고 나서려는 자, 그들에게만 민주주의자로 세상은 허락한다. 이것이 ‘김근태주의’의 첫걸음이다. 김근태를 전설로 떠나보내지 않고 당대의 민주주의 신화로 이어가는 길은 우리의 운명이어야 한다.
<최상명 우석대 교수·김근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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