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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20일 오전에는 김대중-조지 W 부시의 한·미 정상회담이 있었고 오후엔 파주 도라산역에서 두 정상이 전 세계를 향한 공동연설을 했다. 이때 행사요원으로 현장에서 부시의 연설을 듣던 감회가 새롭다.

전달 미 의회에서 부시는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단정하고 극단의 대북 적대정책을 표명했던 터라, 한국 최전선에서 그가 하는 연설 내용에 남북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터였다.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 인도적 지원도 하겠고 북한과의 대화도 고려한다’는 요지의 연설 내용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부시의 태도 변화는 오전의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집요하게 설득한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예정된 시간을 넘겨 진행된 회담에서 김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의 대북 인식 전환 그리고 포용정책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해 ‘정치인의 삶 중 가장 힘든 시간 중의 하나’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라는 본인의 표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후일담을 동행했던 분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다.

7~8일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는 문재인 대통령은 그때보다 더 힘든 상황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 취임 후 이제까지 그의 북한 관련 언급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한반도 분단 역사는 물론 북한의 3대 세습이 왜 가능한지, 그토록 핵·미사일에 집착하는 근본 이유와 북한 군부의 특성 등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고 그저 세계 패권국으로서의 자존감과 국내 정치에 대한 불만 여론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북한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문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을 북한 문제의 해법은 압박·제재로는 한계가 있고 반드시 대화를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점을 그간 남북관계 역사를 통해 설명하며 트럼프의 대북인식을 전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미 정상이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조건 없는 북한과의 대화 메시지를 발표한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회담 시 이제는 제재와 함께 대화를 병행해야 할 시점이라는 점, 그리고 북한과의 대화를 우리 정부가 먼저 시도하면서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유도하겠다는 생각을 전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칭하면서도 고르바초프와 대화를 통해 핵감축 협상에 성공했던 사례를 인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북한엔 굴복이 없다는 사실, 그래서 나름의 명분을 세워줘야 한다는 사실도 꼭 주지시켰으면 한다.

지난달 북한 최선희 외무성 국장이 러시아에서 한 발언 내용, 이후 북한 매체 보도들의 행간 내용, 그리고 지난 9월 마지막 미사일 실험 이후의 북한 행보를 읽어보면 분명 북한은 대화를 희구하고 있음이 간파된다.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대화모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소문이지만, 북한의 식량사정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대에 준하는 심각한 상태라는 소식, 대북 제재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 북한 지방 주민들의 삶이 매우 피폐해져 가고 있다는 최근 방북 인사들의 전언 등을 감안할 때 빠른 시일 내에 대북 제재를 해제하고 남북관계를 정상화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성원 | 한라대 초빙교수·동북아경제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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