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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나 홀로 명절

opinionX 2017. 10. 11. 10:20

-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연휴를 앞둔 목요일 저녁 대학로를 가기 위해 창덕궁 앞을 지나다가 신호에 걸려 대기 중이었다. 마침 눈에 정류장의 막 퇴근한 직장인들이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버스를 기다리는 그들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다음 주가 추석인지라 직장에서 나눠준 선물이 아닐까 여겨졌다. 길어진 옷차림과 조금은 어둡고 차분한 그들의 표정에서 느닷없이 명절 기분이 느껴졌다.

오늘날의 추석을 과거의 추석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지금처럼 흔적만 남아 있는 명절과도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최근까지는 추석이 되면 부모님, 형네 가족과 함께 설악산에 이박삼일 다녀오곤 했다. 속초가 어머니 고향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부모님과 형네 가족은 연휴 때 각각 여행을 떠나고 긴 연휴 동안 나는 집에서 놀 예정이다. 가족 모임은 지난주에 이미 가졌다. 사실 외부의 번다한 만남과 잡무로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을 연휴 때 집중해서 정리해버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다. 연휴 첫날인 오늘 아침도 고요하고 적적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런 약속도 없고 연락 올 일도 없으며 고속도로에서 차 막힐 일도 없다. 명절 당일엔 산책 가듯 가까이 사는 처가에 다녀오면 된다. 이쪽도 한가하긴 마찬가지다. 딸만 넷인 우리 장인, 장모님은 약간의 음식을 해놓고 자식들이 오길 기다린다. 첫째네 가족은 우즈베키스탄에 파견근무를 나가 있다. 그래서 집엔 둘째부터 넷째까지 모이는데, 아이들이 있어 약간 시끌벅적하긴 하다. 그래도 잠시, 아주 잠시뿐이다. 곧 적적해진다. 돌아오는 길 보름달만 크게 휘영청 밝을 것이다.

아버지가 장손이라 어려서부터 집에 제사가 많았다. 시제까지 지내는 대단한 집안은 물론 아니었고, 증조부모의 제사와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사를 지냈고,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도 연이어 돌아가시면서 제사를 모셨다. 어머니는 그걸 혼자 다 해내셨다. 내가 서른이 됐을 무렵, 엄마가 더는 못하겠다고 선언하셨다. 약간의 지지고 볶음이 있었지만 아버지도 순순히 받아들이셨다. 그렇게 우리 집의 제사는 없어졌다. 명절 때 지내는 차례도 당연히 없어졌다. 차례를 지내지 않으니 명절에 친척들 발길도 뜸해졌다.

처음엔 상실감이 있었다. 뭔가를 하다가 하지 않으니 허전했고, 사람들이 없으니 고립감도 들었다. 이 모든 게 음식 때문이라는 생각에 내가 음식을 해서 나르기도 했다. 우리 가족끼리라도 명절 기분을 내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곧 흐지부지되었다. 내가 어릴 때 명절은 고스톱 치는 날이었다. 음식 준비를 다 해놓고 어른들은 명절 전날부터 화투를 잡았다. 그리고 밤새워 쳤다. 목소리들도 커서 자다가 놀라 일어날 때가 많았다. “났다 먹고 고” “한 장씩 주시오” 암호와 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럴 땐 눈을 비비며 기웃거리러 갔다. 새벽이 되면 울음바다가 되곤 했다. 한 잔씩 두 잔씩 술이 들어간 고모들이 섭섭했던 옛일을 꺼내기 때문이다. 그 옛일이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들만 귀하게 키워 자기들은 고등학교, 대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고모가 돈을 딸 땐 조용히 넘어갈 때도 있었다. 담배연기 자욱했고 막걸리와 맥주 냄새도 떠다녔다. 다음날 아침 말끔한 얼굴들로 다시 모여 하하호호 웃는 모습이 내 어린 눈에 참 신기해 보였다. 추석이 되면 이런 기억이 나서 그리워지곤 한다. 이젠 친지들이 곁에 없다. 몇 분은 돌아가셨고, 남은 분들도 예순에 일흔이라 각자의 조촐한 가족 범위 내에서 명절을 보낼 것이다.

아무도 서로 연락하지 않고 방문하지 않는 명절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갑자기 모이기엔 이미 나 홀로 명절은 굳어질 대로 굳어졌다. 그래서 나는 혼자라도 명절 기분을 내볼까 싶다.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장을 봐서 조촐하게 먹고 싶은 것만 만들어 먹으려고 한다. 사실 이건 대추나무 때문이다. 옛날 우리 집 대추나무가 매년 풍성하게 대추를 생산해 나에게 선물해주던 기억 때문에 지난해 꽤 큰 대추나무를 사다가 뜰에 심었다. 그해엔 몸살을 해서인지 대추가 열리지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무사히 겨울을 넘기고 올봄에 거름을 두둑하게 해줬다. 내심 대추가 열리길 기대했는데 고작 네 알 열리는 데 그쳤다. 따서 먹어보니 달긴 달다. 아마 대추만이라도 풍성한 한가위는 내년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싱싱한 대추를 사서 아작아작 씹으며 우아하게 장을 보고 싶다. 아니, 대추는 핑계일 뿐 사람이 많은 시장 구경을 가고 싶은 건 아닌지…. 아이고, 진짜 모르겠다. 장모님 갖다 줄 전이라도 부치면서 명절 기분을 좀 끌어올려 보자꾸나.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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