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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에는 늘 모순이 있고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사 간의 갈등은 불가피하고 그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으로서 노사분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갈등과 분규가 우리 사회의 기본 상식과 배치된 채 지속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화하는 경우다. 이 경우 우리는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사회적 합의라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해 온 경험이 있다.

기륭전자 문제도 그런 것이었다. 대부분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저들에게 문자 메시지로 해고 통지가 날라 온 것이 지금부터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2005년이었다. 해고 사유가 될 수 없는 잡담 등이 이유였다.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저버린 사측에 노동자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후 1895일간의 지난한 복직 투쟁이 시작됐다. 공장 점거, 삭발, 고공 농성, 94일간의 단식 등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안 해본 것이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치열한 싸움이었다.

이런 노동자들의 눈물 어린 투쟁으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상이 사회에 생생히 알려지게 되었고 더 이상 기륭전자의 갈등을 방치하는 것은 단지 노사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마침내 2010년 11월1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여야 국회의원 그리고 많은 종교인들과 사회단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노사는 함께 ‘사회적 합의’에 서명할 수 있었다.

그날 노사는 그간의 주장을 한발씩 양보해 사측은 ‘직접고용 절대 불가’를 철회하고, 노조는 회사의 경영상황이 녹록지 않은 사정을 고려해 고용 시점을 1년6개월 늦출 수 있도록 양보했다. 이후 노조는 다시 고용 시점을 1년 더 양보해 2년6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곡절이 있었지만, 그날의 사회적 합의는 큰 숙제 하나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해 함께 풀어냈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날 사측의 최동열 회장도 “지난 6년간 서로 큰 고통을 겪었으나 사회통합과 노사상생을 바탕으로 이번 합의가 이뤄졌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그 자리에 함께했던 모든 이들, 그리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놓고 있다는 자괴감에 마음이 아팠던 국민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날의 합의는 그렇게 우리 사회의 상식적 구성원들이 서로 연대함으로써 작은 정의나마 이루어갈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단지 거기까지였다. 그날의 합의에 따라 노조는 2013년 5월1일 사업장으로 복직했지만 장장 8개월간 업무 대기가 지속됐다.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월급, 4대 보험 등을 지급하지 않아 8개월간 임금이 체불되기도 했다. 급기야 회사는 지난해 12월30일, 조합원들 몰래 사무실을 이전하는 야반도주의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면서 모든 사회적 합의는 휴짓조각이 됐다. 현재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사측이 도망가버린 빈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을 이어가고 있고, 최동렬 회장집에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는 등의 수모를 겪고 있다.

한진중공업,기륭전자,쌍용자동차,전교조,공무원노조의 조합원들이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사회적 합의,정치적 약속 불이행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문화제를 열었다. 기륭전자 유흥희 분회장이 정부및 사측의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함께 만든 약속을 스스로 부정하는 측과 그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측의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기륭노조 분회장인 유흥희씨는 이렇게 묻고 있다. “누구도 이 사회적 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회사는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한 사회적 합의조차 그냥 종이쪼가리로 취급하며, 최소한의 신의도 지키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노동자들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기륭전자 노조는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일이 지속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사회적 합의조차 불이행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책임을 묻고자 최동렬 회장을 사기죄로 고발하는 사회적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참 안타깝고 치사스러운 시절이다.


정진우 |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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