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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참 나쁜 정치를 하고 있다. 김무성 대표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과 여당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정치권력이다. 그 위임에는 적어도 국민에 대한 책임이 전제되어 있다. 대통령과 여당이 나라 안의 모든 일에 대해 무한책임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정부와 관련된 사태의 경우 더욱이 직접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야말로 나쁜 정치이다. 그보다 더 질 나쁜 정치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국민을 두 편으로 가르는 정치이다. 말하자면 ‘두 국민 정치’이다.

세월호 정국이 길어지면서 정치가 국민들에게 증오와 적대감를 심고 있다. 애초에 대통령은 세월호의 진상이 곧 ‘유병언’이라고 이해한 듯하다. 책임을 물어야 할 유병언이 죽었으니 이제 진상은 더 캘 것이 없고, 나머지는 국회가 알아서 하라는 식의 매정함이 섬뜩하다. 게다가 여·야의 2차 합의안을 언급하며 이른바 가이드라인을 대통령이 제시하는 형국을 만들었다. 절규하는 유족과 시민들은 더 이상 대통령의 국민이 아니었다. 유가족이 전례 없는 보상을 요구한다는 유언비어가 돌고 보수언론은 앞 다투어 유족과 시민을 향해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푸념했다. 자신들이 뱉은 말과 자신들의 기분을 이름 지어 ‘세월호 피로증’이라고 불렀다. ‘대한민국이 당신들만의 것이냐’는 지탄과, 단식하는 유족과 시민 앞에서 ‘막 먹어대는’ 막가파식 패악이 이어지기도 했다. 유가족과 대리운전기사의 폭력사건은 이 애끓는 참사의 본말을 더욱 더 기형적으로 뒤틀었다. 사태를 책임져야할 대통령과 여당에게 가야할 화살이 오히려 유족을 향하는 기이한 반이성적 야만의 질서가 만들어졌다.

해방이후 분단의 세월 속에 우리는 증오와 적대의 역사를 누적시켰다. 아무리 냉전의 시대라 해도 극단의 분열과 갈등은 이념 그 자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겪게 되는 가학적 국가폭력과 희생의 체험이 증오의 싹을 틔우고 적대의 전선을 만들어 낸다. 48년의 제주, 같은 해의 여수 순천, 80년의 광주는 증오와 적대를 생산하는 우리의 집합적 체험이었다. 이제 세월호 참사가 증오와 한으로 적대를 쌓는 또 하나의 현대사가 될 것 같아 두렵다. 국민을 둘로 나눈 후 위기의 정국을 벗어나는 전가의 보도는 늘 그랬듯이 ‘민생’이었다. 누구의 민생이고 어떤 민생인가? ‘세월호의 국민’에게 민생의 구호는 기만의 언어일 뿐이다. 대통령과 여당에게 세월호의 유족이나 유족 편에 선 시민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다. ‘촛불시민’과 ‘안녕들 하십니까’를 외친 청년들, ‘앵그리 맘’, 쌍용차의 노동자들, 강정마을을 지키려는 사람들, 송전탑을 반대하는 밀양의 주민도 그들의 국민일 수 없다. 국민을 둘로 나누고 적대와 증오를 심는 참으로 나쁜 정치가 아닐 수 없다.

세월호 가족대책위 대표들이 16일 오후 국회 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 대한 대책위의 입장을 밝히는 동안 청와대를 방문하고 돌아온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기자회견장을 지나 본청으로 들어서고 있다. (출처 : 경향DB)


며칠 전, 문재인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기념 학술심포지엄의 기조연설에서 오늘날 정당정치의 위기를 정체성의 위기, 당 기반과 시민참여의 위기, 소통의 위기라는 3중의 위기로 진단했다. 아울러 정치와 정당,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을 ‘생활민주주의’, ‘생활정당’,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한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문재인 의원으로서는 우리 정치가 나아갈 큰 그림을 그린 셈인데, 언론에서는 고약하게도 네트워크 정당 만들어서 당권 잡아 보자는 속내로 해석하니 꽤 섭섭하고 답답했던 모양이다. 트위터에 글을 올려 ‘전문’을 봐달라며 생활정당, 생활민주주의, 모든 이를 위한 정치를 재차 강조했다.

문재인의 ‘모든 이를 위한 정치’는 ‘두 국민 정치’의 대척점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모든 이를 위한 정치’를 탈냉전 시대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넘어선 모든 계층과 모든 지역, 모든 세대, 모든 성을 위한 정치로 규정하고, 모든 이의 ‘생활’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강조했다. 어떤 처지의 국민도 보듬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고 누구에게도 편향되지 않는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좋다. 화합과 화해의 정치가 그려져 더 의미가 있다. 두 국민의 나라는 미래가 없다. 적대와 갈등으로 버티는 정치에서 시민의 삶과 시민의 생명은 정치를 위한 수단이요 장식일 뿐이다. 그래서 정치와 국가와 민주주의의 중심에 시민의 삶이 있는 ‘모든 이를 위한 생활민주주의’야말로 우리 정치의 새로운 미래라고 할 법하다. ‘모든 이를 위한 정치’는 문재인의 정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치가 필연적으로 나아가야할 길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곧 정치가 살고 나라가 사는 길일 수 있다. 나쁜 정치를 버리고 참 좋은 정치로 가는 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이 모두 눈과 귀를 크게 열어야 할 대목이다.


조대엽 | 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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