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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기고]엘리엇, 박근혜, ISD

opinionX 2018. 7. 23. 13:59

유럽 집행위원회가 작년 7월, ‘유럽에서 ISD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외자기업 국제중재권(ISD)이란 외자기업이 국가를 국제 중재에 직접 회부해서 금전 배상을 요구하는 제도이다. 패소할 경우, 해당 국가의 사법권이 작용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국가가 금전 배상책임을 지는 사태가 생긴다. 예를 들면 국제 사모펀드인 엘리엇이 이달 14일, 박근혜 정권 시기의 국민연금이 삼성의 합병을 찬성한 것을 이유로 약 8600억원을 배상하라고 정부를 국제 중재에 회부했다. 이것이 바로 이 제도이다.

역사의 역설일까?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1년, 한·미 FTA 발효를 촉구하면서 “ISD가 있거나 없거나 문제가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다름 아닌 박 전 대통령의 행동을 문제 삼아 국제 중재를 걸었다. 그리고 그 유일한 근거가 된 것이 한·미 FTA이다. 이명박 정권 시기 한·미 FTA를 발효하지 않았다면 엘리엇의 국제 중재는 불가능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지금 엘리엇의 제소를 알았으면 무어라고 말할 것인지 묻고 싶다.

유럽은 왜 외자기업의 국제중재권 폐기를 선언했을까? 결론의 일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제 중재 판정은 종종 모순되어, 사법의 핵심적 요소인 법적 안정성이 결여된다. 이 문제는 외자기업이 판정관 중재인 한 명을 정할 수 있는 특권과 무관하지 않다. 법원 재판에 비유한다면, 원고와 피고가 판사를 고를 수 있다니 얼마나 불안정한가?

더 큰 문제는 국가의 정당한 규제권을 제약할 위험이다. 국제 중재에 회부되는 것이 두려워 공익 규제에 소극적이 된다. 이를 흔히 ‘위축 효과’라고 부른다.

한국에 닥친 최근의 외자기업 국제중재권 사태는 엄중하다. 이미 론스타에 의해 5조원대의 국제 중재에 끌려가 있다. 여기서는 벨기에와 체결한 투자 협정이 근거가 되었다. 앞의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사모펀드 메이슨 캐피털도 국민연금이 삼성 합병에 찬성한 것을 문제 삼아 한·미 FTA를 근거로 2000억원의 배상을 요구했다. 이미 지난 6월에는 이란의 다야니 가문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730억원 규모의 ISD 재판에서 한국 정부의 패소 판정이 나왔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 시기의 잘못을 바로잡는 정당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 국제 중재를 빌미로 저항한다.

지금의 정세에서 더 늦기 전에 외자기업의 국제중재권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첫째, 유럽과 같이 국제중재권을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럽은 국제중재권 종식 선언에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했다. 작년 9월 발효한 유럽-캐나다 경제무역포괄협정에서 국제 중재 대신 투자법원제(ICS)를 채택했다. 유럽의 새로운 혁신에서는 법관이 외자기업 소송을 심판한다. 외자기업은 더 이상 심판관을 고를 수 없다. 유럽은 이달 서명한 일본과의 경제동반자협정에서도 새로운 대안을 적용하는 협상을 진행 중이다.

유럽과 같이 국제 중재를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것은 하나의 국제적 흐름이다. 일본, 호주, 베트남 등 11개 태평양 국가들은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 11)을 출발시키면서 투자 계약, 투자 협정 분야에서 국제 중재 조항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외자기업 국제중재권 폐지에 합류하여 이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대안 모델이 유럽식 투자법원이 될 것인지, 아니면 원칙적으로 한국의 국가배상법과 행정 소송을 통한 사법 구제를 거치게 할 것인지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 어느 대안이든 국제중재권을 폐지해야 한다. 

둘째, 이미 제소된 사건들에 대한 철저한 대응이 필요하다. 5조원대 론스타 사건에서는 론스타가 애초 대주주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핵심 쟁점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국민에게 투명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지난 6월, 한국이 최초로 패소한 사건의 중재 판정문을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2년에 제기된 론스타 사건도 깜깜무소식이다. 투명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리적 여론을 만들 수 있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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