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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적으로 정당한 판결이라도 때를 놓치면 그 의미는 반감된다. 민사소송법 제199조가 종국판결의 선고기간을 5개월 이내로 규정하고 있지만, 재판의 지체는 불가피하다.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27조 제3항의 존재 이유는 이런 지체가 과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연된 재판과 관련해서 강구할 수 있는 구제수단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가배상책임의 차원에서, 다른 하나는 헌법소원심판청구의 차원에서 강구할 수 있다. 그러나 재판지연에 따른 국가배상책임의 가능성을 제시한 독일과 같은 특별규정(민법 제839조 제2항 제2문)이 없는 이상, 일반적인 국가배상책임의 법리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국가배상책임의 인정은 이론상의 가능성에 그치고 기대할 수 없다. 헌법소원심판의 경우에도 “헌법 제27조 제3항 제1문에 의거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실현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입법형성이 필요하다”고 판시한 헌재 1999.9.16. 98헌마75에서 볼 수 있듯이, 인용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유럽과 독일은 우리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유럽인권협약 제6조 제1항은 ‘상당한 기간 내에 심리를 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고, 유럽기본권헌장 역시 행정적 처리 및 재판이 상당한 기간 내에 행해질 것을 요구한다(제41조, 제47조). 유럽최고재판소는 상당한 절차기간의 원칙을 이미 오래전부터 인정하여, 비단 행정절차만이 아니라 재판절차에서도 인정하였다. 나아가 유럽인권재판소는 상당한 기간 내에 판결을 받을 권리가 침해될 때에는 효과적인 권리구제가 회원국 국내법에 존재해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유럽인권재판소는 2006년 6월 재판지연에 대한 유효한 권리구제가 독일법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인하였고, 2010년 9월 독일 연방정부에 대해 늦어도 1년 내에 재판지연에 대한 권리구제제도를 도입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독일 연방정부는 2011년 11월 ‘재판지연보상법’을 제정, 동법이 같은 해 12월3일부터 헌법재판을 비롯한 모든 재판에 통용되고 있다. 실례로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는 2015년에 처음으로 헌법소원심판절차의 과도한 지속을 이유로 심판청구인에게 손실보상을 해주라고 판시하였다. 재판부의 소관 문제가 불분명하고 사건배당도 되지 않아 소요된 약 30개월의 재판지연은 상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법 시행 2년의 중간평가에 의하면, 손실보상소송의 홍수는 일어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재판의 신속화를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재판의 실효성은 시간적 요소에 좌우된다.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입법적으로 구현되지 않아 그 권리가 사실상 말뿐인 것은 재판청구권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상황이다. 연방 헌법(기본법)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독일과 달리 우리는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기에, 그것을 입법으로 구체화할 요청은 그들보다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입법의 부재상황을 입법형성의 여지(입법재량)를 내세워 정당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재판지연보상법은 효과적인 권리보호의 요청과 법관의 독립성 요청 간의 충돌에서 나름의 조화로운 해결책의 산물이다. 언제까지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에 머물 수는 없다. 정의의 지체가 문제되지 않을 사전의 방책 역시 요구된다. 따라서 행정소송에서 독일처럼 집행정지의 원칙이 채택되어야 한다.

<김중권 | 중앙대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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