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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의 달 12월, 한해 한두 번 보는 옛 동기, 살짝 서먹한 한 순배 돌고 나면 뭐 하고 사는지 요즘 사는 게 어때 같은 말들이 오갈 테지요. 그럭저럭 산다거나 죽 쑤고 있다, 뻔한 걸 뭘 묻냐며 쭈뼛거리다가 술 두어 순배 돌면 슬슬 헤실헤실해집니다. 어디 가서도 말 못할 부부 잠자리 문제나 배우자의 외도, 이혼 절차 중이라거나 자녀 뒷문으로 넣은 무용담에 뒤로 애인 둔 얘기까지 털어놓기도 하지요. 술은 동고동락의 옛날로 돌아가게도 하니까요. 말하면서 아차 싶지만 ‘에이 뭐, 우리 사인데’ 하며 허심탄회합니다.

그런데 그때 거기서 끄덕끄덕 들어주던 친구 중에는 간혹 다른 술자리에서 “걔가 그러면서 어땠는지 알아?!” 하며 들은 얘기를 자기만 아는 토픽으로 삼는 이도 있습니다. 들은 대로 본 대로 이러저러하게 아무렇게나 말을 늘어놓는다는 말, ‘주워섬기다’ 그대로인 친구, 어디 가나 꼭 있습니다. 그 너스레에 다들 박장대소하지만,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심각한 가정사나 개인사를 그의 농지거리로 전락시키는 셈이지요. 사랑과 증오가 종이 한 장 차이이듯 벗도 말 놀림 하나에 바람 휑하니 돌아서기도 합니다.

영화 <올드보이>는 놀린 혓바닥으로 시작해 잘린 혓바닥으로 멀리 이사 가기 전에 본 걸 무심코 흘렸는데 15년 뒤 참혹한 복수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죠. 가위로 자신의 혀까지 잘라내지만 끝내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속담 ‘들은 말은 들은 데서 버리고 본 말은 본 데서 버려라’는 누군가의 삶을 안줏거리나 화젯거리로 삼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걔 요즘…’이 친구에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고 긴 앙심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친구의 사정을 제대로 공감한다면 절대로 가십거리로 여기진 않을 겁니다. 설령 이목이 끌리고 머리에 떠올랐더라도 딱 거기까지입니다. 친구는 안주가 아니니까요. 입 궁금하면 안주를 더 시켜야죠.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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