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눈물도 아름다울 때가 있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절망의 눈물이라 해도 그 안에 누군가의 정성을 다한 곡진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 났다’고 말하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착하고 총명한 동생의 성공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헌신한 누이의 삶으로부터 오는 깊은 울음에는 아무리 삼류 드라마라 해도 감동과 아름다움이 있다. 그 감동과 아름다운 마음의 어디쯤에 우리가 잃어버린 휴머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은 ‘사람’을 향한 간절한 마음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전 지구적 자본화가 진행되면서 생활이 편리해지고 삶이 풍요로워졌다는 21세기에 이르는 동안 우리가 꾸준히 잃어온 것이 있다면 휴머니즘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우리 사회에는 이런 사랑과 감동의 휴머니티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말에 동의하게 된다. 자기 자신부터가 그 상실감으로 인한 쓸쓸함을 가슴에 안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상실감과 쓸쓸함은 역설적이게도 편리함과 풍요로부터 온다. 편리함과 풍요로움에 대한 갈망은 인류의 초기 자연 자체가 커다란 위협이었을 때부터 생겼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위협적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테크놀로지가 발현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순수하게 인간의 삶의 안전성을 위한 테크놀로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편리함과 풍요가 삶의 필요조건을 넘어서 인간의 탐욕과 연결되면서 탐욕은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라는 당의를 입고 편리와 풍요를 앞세워 시대적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는 우리의 구체적 일상까지도 자본에 종속되어 가치관의 변화와 함께 공동체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고 개인이기주의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휴머니즘은 급격하게 그 지위를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편리와 풍요는 삶의 최종 목표나 된 것처럼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이 되면서 우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개발’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의 개발은 고대에 재해와 같은 삶의 위협으로부터 사람을 지키려는 휴머니즘이 잠재된 ‘개발’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탐욕이라는 이름의 ‘개발’이며 지금까지 자연을 꾸준히 침탈하여 자연의 순환질서를 흔들고 있는 개발이다.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테크놀로지가 지금은 편리와 풍요를 위한 개발로 변했으며 그것은 인간의 탐욕을 각색한 자본주의의 존재 방식에 다름 아닌 것이다.

현재 이러한 본질적 문제의 사회적 표피에는 ‘개발과 보존’이라는 대립과 갈등이 있다. 국립공원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에 따른 찬반 문제의 본질도 결국은 개발이라는 자본가치 중심의 삶과 자연보존이라는 인본가치 중심의 삶이 충돌하고 있는 21세기 전 지구적 상황의 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위한다는 명분 뒤에는 반드시 자본의 논리가 들어 있고, 이제는 거의 노골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개발논리를 펼친다. 이는 분명 ‘필요’의 한계를 넘어선 ‘탐욕’이다. 전 세계가 자본화되면서 인간의 탐욕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중 하나라는 명분으로 정당성을 얻기도 한다. 그리고 ‘개발’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방법으로 전락했다.

오색케이블카 재추진 논란 (출처 : 경향DB)


그래서 국립공원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개발과 보존’이라는 현상적 사안만이 아닌 결국 우리 현대문명의 본질적인 문제와도 닿아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보면 자본가치 중심의 삶과 인본가치 중심의 삶이라는 대립이며, 현재 우리에게는 어떠한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개발이라는 자본가치 중심의 삶을 선택한 현재의 삶이 진정한 삶의 정답이 아니라면, 인본가치 중심의 삶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세상,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 눈물도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선택이 될 것이다.


박두규 | 시인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