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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지상주의가 악마를 낳았고, 희생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국민을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은 조재범 전 국가대표 쇼트트랙 코치의 선수 상습 성폭행 사건은 체육계에 널리 퍼져 있는 성적제일주의에서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결과만을 최고로 여기는 환경이 현장의 부조리를 눈감아주고,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9일 노태강 제2차관의 긴급 브리핑을 통해 체육계 성폭력 비위 근절을 위한 각종 대책을 발표하고 재발 방지 노력을 약속했다. 선수 성폭행 사건이 알려진 뒤 문체부 전 직원이 출근해 밤새 브리핑 자료를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문체부는 먼저 자신들의 문제점을 돌아봐야 한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과도한 목표를 설정하고 현장에 강요한 이들이 정부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4년 12월16일 대한체육회는 서울 태릉선수촌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대비 종목별 경기력 향상대책 보고회’를 열고 평창에서 금8·은4·동8개로 종합 4위를 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전체 금메달 8개 중 빙상연맹의 몫은 7개. 쇼트트랙에서 5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2개를 딴다는 내용이었다. 금메달 7개는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한국선수단 전체가 거둔 종합 5위(금6·은6·동2) 성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빙상연맹의 목표는 최대치를 강요한 문체부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발표를 마친 김재열 빙상연맹 회장은 단상에서 내려온 뒤 “자발적으로 설정한 목표인가”라는 질문에 고개를 숙이며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지 큰일”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새 정권에서도 정부는 한국 선수단의 성적이 국내에서 열리는 평창 올림픽의 성공으로 직결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개막을 3개월여 앞둔 선수단 격려 현장에서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목표를 달성하면 선수들의 이름으로 시를 짓겠다”고 했었다.

성적제일주의는 지상명령이 되어 현장 관계자들을 옥죄었다. 언어 폭력, 폭행 등의 수단도 묵인됐다. 선수 성폭행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진 곳은 태릉·진천 국가대표 선수촌과 한체대 빙상장 등의 지도자 라커룸이다. 코치가 선수에게 가하는 위해 상황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장소지만 성적지상주의에 매몰된 현장에서는 이를 모른 채 눈감는 식의 결과로 이어졌다. 국가대표 훈련의 관리 책임을 빙상연맹, 대한체육회를 넘어 정부에도 묻게 되는 이유다.

<김경호 선임기자 | 스포츠부 jerom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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