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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상종목에서 국가대표를 지낸 한 선수는 지난여름을 해외에서 보냈다. 폭염을 피해 출국한 게 아니다. 앞서 그는 대한빙상경기연맹의 개혁을 촉구하는 움직임에 참여했다. 전명규 한국체대 교수(전 연맹 부회장)로 대표되는 기득권세력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결국 홀로 외국으로 떠났다. 개인훈련을 하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서야 귀국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여자컬링 전 국가대표 ‘팀킴’이 김경두 전 대한컬링경기연맹 부회장과 그의 딸·사위인 김민정·장반석 감독으로부터 폭언과 사생활 통제, 비인격적 대우에 시달렸다고 폭로했다. ‘겨울동화’에 열광하던 대중은 충격에 빠졌다. 컬링계 내부를 아는 이들의 반응은 달랐다. 터질 게 터졌을 뿐이라고 했다.

컬링 전 여자 국가대표팀인 김경애 김영미 김선영 김은정 김초희(사진 왼쪽부터) 가 1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최근 불거진 논란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갖고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팀킴은 “가족이라 칭하는 틀 안에서 억압, 부당함, 부조리에 불안해했고 무력감과 좌절감 속에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격려금과 포상금을 제대로 배분받지 못했으며, 팬들로부터 받은 선물과 편지도 뜯겨진 채로 받았다고 했다. 김·장 감독 부부 아들의 어린이집 행사에 동원되고, 스킵(주장) 김은정 선수의 결혼을 이유로 포지션 변경을 강요당했다고도 했다. 실체적 진실은 19일 시작된 문화체육관광부·경상북도·대한체육회 합동감사에서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 출신 피터 갤런트 전 코치도 팀킴을 100% 지지한다고 밝힌 걸 보면 팀킴 주장이 사실일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김 전 부회장 측은 “감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입장이다.

<스포츠, 인권을 만나다>의 공동저자인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상당수가 인지하고 있던 일인데도, 결국 피해 당사자들이 입을 열어야 했다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번 사건이 한국 스포츠인권의 미래를 가름할 것으로 봤다.

“지도자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세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하게 됩니다. 운동을 그만두는 유형이 있고, 남아서 버티며 똑같은 괴물이 되어가는 유형도 있습니다. 나머지가 팀킴처럼 내부고발하는 유형인데, 드물고 귀한 경우지요. 만약 이번 폭로가 그대로 묻힌다면 ‘팀킴을 봐라’ 이렇게 될 수 있어요. 팀킴 같은 국제적 스타플레이어가 나서도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면, 선수들의 무기력증은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수가 오랜 기간 해당 종목을 일궜다는 ‘개척자 프레임’으로 독재적 전횡을 하는 사례가 다른 종목에도 많습니다. 이번 사태는 한국 스포츠의 낡은 악습이 사라지느냐, ‘학습된 무기력증’의 심화로 이어지느냐 갈림길이 될 겁니다. 기성 스포츠계가 결단을 내려 제대로 처리하고, 시민들도 계속 주목했으면 합니다.”

서지현 검사. 정지윤 기자

검찰의 내부고발자 서지현 검사가 최근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을 폭로함으로써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의 본격 시발점이 된 서 검사는 검찰이 변한 게 없다고 했다. “검찰에서 제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해요. 우리는 너를 괴롭힌 사람을 잘 대해주고 있다. 서지현을 다시 검사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우리 조직은 아무 문제가 없다….”

지난 17일엔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폭로 이후) 대외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 말했다. ‘이제 가만히 있어라. 그만하면 됐지 않으냐.’ 나는 집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더 가만히 있는가? 가해자에 대한 1심 판결조차 나지 않았다. 상정된 미투 관련 법안은 하나도 통과가 안됐다 한다. 뭐가 그만하면 됐단 말인가?”

곳곳에 ‘가만히 있으라’투성이다. 검찰에선 서지현을 보라, 고 한다. 서지현을 배제하고, 대신 서지현을 공격한 이들을 껴안으면서. 팀킴은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김경두 전 부회장, 김민정 감독과 올림픽 전부터 대화하려고 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너희가 얼마나 많은 혜택을 받았는지 아느냐’는 말뿐이었다. 얘기를 하려는 선수를 배제하려고 했다.”

KBS 드라마 <죽어도 좋아>의 한 장면이다. 백진상 팀장(강지환)은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강인한 사장(인교진)에게 저항한다. 직원들은 침묵한다. 강인한은 “영웅 행세하면 박수라도 쳐줄 줄 알았느냐”며 비웃는다. 백진상은 “뭐라도 소리를 내. 벨소리든 발소리든. 내 말에 동의는 하지만 겁은 나고, 그렇지만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의사표시를 하라”고 외친다. 하나둘씩 휴대전화 알람 소리가 들리더니 박수가 터진다.

팀킴과 서지현의 입을 막는다 해도 또 다른 이들의 알람이 울려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립되기 전에, 영웅 행세한다는 비웃음을 듣기 전에 법과 제도와 시스템이 먼저 알람을 울려주기 바란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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