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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도모할 때, 그 일의 가치와 명분이 우선 중요하지만, 과연 그 일을 실현해 낼 수 있는 현실적 역량이 충분한가, 이 점 또한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지난 10여년 동안 아쉬웠던 것은, 한국 스포츠문화의 전반적인 개혁, 특히 학교 체육의 건강한 발전을 위한 여러 모임이나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정작 책임 있는 당국의 핵심에서는 이에 관하여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그나마 어떤 사건에 의하여 그들로서도 불가피하게 참석하게 될 때조차 대단히 방어적이었다. 나름의 노력과 시간들은 또 하나의 ‘잃어버린 10년’이 되고 말았다. 이른바 ‘국위선양’의 깃발만이 펄럭이는 분위기 속에서 스포츠문화의 폐습들은 더 많이 생산되고 확산되어 어느덧 어디서부터 누가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적폐’가 되고 말았다.

그랬는데, 이제는 조금 기대를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범위를 학교 체육 정상화로 좁혀 보면, 적폐에 따른 비극적 사건들과 파탄의 양상들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잠시 검색해보니 최근까지도 현장 지도자들의 폭행 및 성폭력은 지속되고 있다. 체육교과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상태고 그런 대로 유지되는 교과의 실제 내용, 그러니까 체육이 무엇이며 몸이 무엇이며 건강한 신체 활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20세기의 개발주의식 신체관이 지배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런 상황에서 최근 ‘학교체육진흥회’가 출범했다. 지난 10월26일 창립 총회를 가졌으며 연말까지 조직 구성을 완료해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 면면이 중요하다. 창립 총회에는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안민석 국회 문체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의 관심과 영향력 아래에 교육부 추천 2명, 시·도교육청 추천 3명, 문체부(대한체육회 포함) 추천 3명, 외부 2명 등의 실무적 이사진이 구성된다.

위 언급한 인사들은 그간 한국의 스포츠, 좁게는 학교의 체육문화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보여왔다. 엘리트 체육 위주의 성적 지상주의가 아니라 보다 많은 학생들의, 보다 다양한 관점의, 보다 일상화된 건강한 체육 문화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

유은혜 장관은 “학생·학부모·학교 관계자들의 다양한 요구 충족을 통해 참여 학생들의 교육적 경험을 확대하는 등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정권에서 ‘참 나쁜 사람’으로 찍혀 고초를 겪었던 노태강 차관은 체육국장 시절부터 학교 체육의 ‘정상화’에 관심이 많았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부터 ‘국위선양’ 일변도의 체육정책에 이의를 제기했던 안민석 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를 대표하는 조희연 교육감 역시 억압과 통제에 따른 훈육적 신체관 대신 자율적이고 다양한 신체의 자유와 문화를 강조해온 학자였다. 조 교육감의 저서 <동원된 근대화>는 사회통제로서의 반공 규율과 개발주의 담론으로서 국가주의적 동원체제가 어떻게 한국 사회의 집합적 심성을 구성했는지를 밝힌 책이다. 조 교육감은 ‘학교체육진흥회’를 최고 수준에서 책임질 이사장으로 추대된다고 한다.

간략히 살폈듯이, 당장은 학교 교육 문제지만 장차는 한국 사회의 가까운 미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의제가 되는 ‘학교 체육 정상화’에 있어 이른바 ‘책임 있는 당국자’들의 면면은 지난 ‘잃어버린 10년’과는 확연히 다르다. 단순히 ‘스포츠를 사랑하는’ 개인적 관심이 아니라 장관, 국회의원, 교육감 등의 무게로 참여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 또한 정책적으로 막중하며 역사적으로 중대하다.

여기에 결정적인 인사는 대한체육회다. 진흥회의 구조라는 면에서는 문체부 옆에 의자 하나를 더 놓는 정도지만, 대한체육회는 다른 모든 기구의 책임과 역할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무겁다. 우리 스포츠의 일상 문화가 전근대적이고 학교 체육 또한 붕괴되기 일보 직전인 작금의 사태에 있어 대한체육회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거꾸로 얘기하면 대한체육회가 어떤 가치와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의해 오랜 ‘적폐’가 하나둘씩 해결될 수도 있다.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은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날 무렵 어느 인터뷰에서 “소수 정예를 키워서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이제 우선 학교 체육이 정상화돼야 한다. 그래야 저변이 확충되고 아이들도 스포츠를 통해 민주시민으로 양성된다”고 말했다. 이제 그 말의 긍정적인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

비영리법인이라는 조직의 성격상, ‘학교체육진흥회’가 수많은 이해관계가 뒤엉켜 있어 그야말로 ‘고르디아스의 매듭’이 되고 만 지금의 (학교) 스포츠 현실을 일시에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관심’과 ‘영향력’을 언급했다. 위의 인사들 모두 학교 체육 정상화에 오랫동안 ‘관심’을 표명해왔고 이제는 그것을 실천할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조직의 입장에 따라 약간의 이견과 불가피한 조절이 있을 수는 있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한국 사회의 다른 뜨거운 의제들과 같이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충돌할 정도는 아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현재의 인적 구성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말 참담한 현실이 아니고 무엇인가.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문재인 대통령도 “학교 체육이 제대로 서야 우리 학생들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고 강조하면서 “운동부 중심의 학교 체육을 전면 개편하고 일반 학생들의 학교 체육 활동을 강화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대통령에서 실무 장관과 국회의원, 체육회장, 각 시·도 교육감까지 의견 일치가 되기도 드문 일이다. 학교 체육을 정상화해 우리의 미래를 실질적으로 건강하게 경쾌하게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게다가 ‘국론 분열’도 없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역사적 과제 아닌가.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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