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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과 청소년 등을 협박해 성착취 불법 동영상을 찍게 하고 온라인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유포한 혐의로 구속된 20대 남성 조모씨가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들끓고 있다. 취약한 처지의 여성들을 협박해 성착취 동영상을 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후폭풍이다. 23일 오후 7시 현재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 청원에 235만여명이 동의했다. 역대 최다 기록이다.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원합니다’에도 165만여명이 동참했다. 합쳐서 400만명을 넘어섰다.

텔레그램은 보안성이 강한 모바일 메신저다. 성착취 범죄자들은 이곳에 비밀 대화방을 개설하고 영상물을 유포했다. ‘갓갓’이라는 운영자(미체포)가 1~8번 대화방을 운영하며 ‘n번방 사건’이란 명칭이 생겼다. 이후 유사 대화방이 여러 개 등장했는데, ‘박사’라 불린 20대 조모씨가 만든 ‘박사방’이 가장 악질로 꼽혀왔다. 박사방의 실체는 최근 조씨가 구속되며 드러났다. 조씨는 아르바이트 등을 미끼로 여성들을 유인해 신체 사진을 받아낸 뒤 신상정보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해 성착취물 촬영을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이 확인한 피해자만 74명, 이 중 16명이 미성년자다. 피해자들은 박사방 내에서 ‘노예’로 불렸다. 조씨는 유료 대화방을 단계별로 구축해 영상을 뿌렸다. 1단계 20만~25만원, 2단계 70만원, 3단계는 150만원을 받았다. 성착취물 내용은 차마 지면에 옮기기 어렵다.

소라넷, 웹하드, 다크웹(특수한 브라우저를 통해야 접근 가능한 웹), 텔레그램…. 디지털 성범죄는 공권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대만 옮기며 계속되고 있다. 범죄의 양태는 갈수록 추악하고 잔인해진다. 국회와 법원·검찰의 책임이 크다. 

지난 3일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 속기록을 보자. 쟁점은 ‘반포(유포) 목적이 아니어도 딥페이크(원본에 다른 이미지를 더해 가공의 영상을 만드는 기술) 영상물 제작을 처벌할 수 있는지’였다. 정점식 미래통합당 의원은 “자기만족을 위해 나 혼자 즐긴다 이것까지 (처벌로) 갈 거냐”고 했다. “예술작품이라 생각하고 만들 수도 있다”(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청소년들이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김오수 법무부 차관) “나 혼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 없다”(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는 발언이 이어졌다. 모두 법조인들이다. 한국 사회 주류의 저열한 젠더감수성, 뿌리 깊은 ‘가해자 중심주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디지털 공간의 특성상 일단 유포된 영상물은 매우 빠른 속도로, 엄청난 확산성을 갖고 퍼져나간다. 피해자 상당수가 극단적 선택을 고민한다. 죽음으로 항변한 이의 영상조차 ‘유작’으로 불리며 소비된다. 한 판사는 “디지털 성범죄를 강간·강제추행 등 직접 접촉 성범죄보다 가벼운 성범죄로 생각하는 경향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 성범죄는 (영상물) 제작 즉시 피해가 완료되는 범죄가 아니다”라며 “제작·유포·소지 모두 피해자 인격에 심대한 상처를 주는 개별적이고 새로운 가해행위로 봐야 한다”고 했다.

박사방의 동시 접속인원은 최대 1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박사방은 수많은 n번방의 하나일 뿐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는 n번방 60여곳의 참여자 수를 총 26만명으로 추산한다. ‘과장’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 사람이 여러 곳에 중복 접속했을 것이라는 게 근거다.

또 다른 가능성은 없나. 여러 명이 입장료를 n분의 1로 나눠 부담하고 계정을 공유한 사례도 있지 않을까. 넷플릭스 계정도 월 1만4500원에 4인이 공유하는 게 트렌드다. 지난 주말에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텔레그램 탈퇴’가 오르기도 했다.

26만명보다 적다고 치자. 2만6000명, 아니 2600명이면 눈감아도 괜찮은가? 인간의 존엄은 숫자로 따질 수 없다. 미성년자를 포함해 여성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놀이’로 즐긴 사람은 모두 공범이다. 경찰도 “박사방 유료회원은 전부 수사선상에 놓고, 인적사항이 특정되는 대로 처벌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경찰청은 24일 신상정보 공개 심의위원회를 열고 ‘박사’ 조씨의 이름·나이·얼굴 등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 조씨의 신상정보는 공개해야 한다. n번방 참여자도 모두 추적해 처벌해야 한다. 호기심으로 ‘눈팅(지켜보기)’만 했다고 면죄부를 줘선 안된다. 

n번방이야말로 반(反)사회적 바이러스다. 영화 <벌새> 감독 김보라의 말을 빌리면 “지금 한국의 성범죄에는 ‘팬데믹’ 선언이 필요하다.” 감염병 피해자인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도 공개하는 시대다. 성착취 바이러스는 박멸하고 가해자는 응징하라.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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