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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비좁을 대로 비좁아진 도시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주 약간의 프라이버시라도 얻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지하철 의자의 가장 끝자리는 적어도 한쪽은 누군가와 부대끼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모든 승객들의 제1지망 좌석이다. 버스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빈자리부터 골라 앉고, 일단 한 명씩 채워진 다음에 두 번째 착석 라운드가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원자 오비탈에 전자가 채워지는 방식을 설명한 훈트의 규칙과 닮아 학창 시절 화학시간에 자주 거론되는 예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거의 차이가 없는 옵션을 두고 벌이는 다소 우스운 경쟁이다. 하지만 인구과밀의 콩나물시루 속에 매일 산다고 해서 생명으로써 자존감과 존엄성 자체가 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타인과 수시로 개인 영역을 겹치게 됨으로써 의도치 않은 침범이 빈번해지고, 그로 인해 만인이 느끼는 속상함과 불쾌감은 온실가스만큼이나 왕성하게 생산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공간의 문제는 바로 가시적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진다. 말하자면 내가 자리에 먼저 앉은 이상 적어도 누군가 무턱대고 내 허벅지 위에 앉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100% 보장할 순 없지만 웬만해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소리에 관해서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원치 않는 음성신호가 제멋대로 내 청각기관 안을 헤집고 들어오는 일은 엄연히 개인의 고유영역을 침투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물리적 영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타인이 낸 소음이 내 귓바퀴에 닿을 때 ‘찰싹’ 하는 소리가 나지 않아서일까? 만약 소리를 손으로 만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셈이다. 옆 사람을 툭툭 건드리거나, 꼬집거나, 귀찮게 구는 일 정도는 예사. 지하철 한 칸에 탄 모든 사람들을 집단폭행하는 것과 진배없는 야만적 행위도 다반사이다. 게다가 소리의 크기 또는 강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본인들이 나서서 개인정보를 유출하질 않나, 조금도 듣고 싶지 않은 대화의 내용을 무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지향성 음향장비’ 시연회에서 참관하던 경찰과 취재진이 귀를 막고 있다.(출처: 경향DB)


대중교통수단에서는 그나마 소음이 당당한 문젯거리로 취급을 받는다. 층간소음, 실외기로 인한 소음 등도 제대로 해결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사회적 반응이 느릿느릿하게 일어나고는 있다. 그러나 진정한 소음의 사각지대가 하나 있다. 바로 길거리이다. 가장 심한 이동통신 매장을 비롯하여 술집, 화장품가게, 슈퍼, 심지어는 노래방까지 누군가의 그 부끄러운 가창실력을 버젓이 길가에 쏟아낸다. 분명히 임대한 공간 외에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이 상점들은 뻔뻔스럽게도 점포 바깥 공간도 자신의 소유로 여기고 있다. 길 쪽으로 온갖 소음을 내뿜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건 내 오디오 시스템을 이웃집 안방에다 설치해놓는 격이다. 보행자는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 소리공격을 온몸으로 받으며 걸어야 하는가? 외부를 향해 소리를 트는 모든 행위는 타인의 음성학적 공간에 대한 불법점거이다. 물론 점포 앞 공간 자체를 점유하는 일도 불법이다. 거리에 물건을 내놓거나 간판을 설치하는 일은 모두 불법적인 도로점용행위에 해당되는 단속대상이다. 이런 규칙이 조금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동네 한 바퀴만 돌고 와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실제 공간도 그런데 소리까지 기대한다는 건 무리라고 결론짓기 쉽다. 바로 이럴 때 눈을 돌려야 하는 곳이 자연이다. 우리가 무시하고 있던 것의 중요성을 늘 일깨워주는 곳이지 않던가?

그리 대단치 않은 문제로 치부되어온 소음은 2000년대부터 생물체에게 미치는 심각한 악영향이 본격적으로 밝혀지면서 이젠 활발한 연구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가령 도심에 사는 박새는 주변의 시끄러운 교통상황 속에서 의사소통하기 위해서 평소보다 높은 주파수로 노래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여러 조류와 영장류, 고래, 설치류 등에서도 나타났다. 어떤 개구리는 차 지나가는 소리 때문에 이성의 짝짓기 노랫소리를 잘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초음파 대신 소리로 먹이를 포착하는 박쥐는 차량이 많은 도로를 피해 다녔고, 소음 때문에 포식자의 접근소리를 듣기 어려운 다람쥐들은 밥 먹다 말고 자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야 했다. 동물에서 경계행동의 증가란 여타 섭생 또는 번식행동의 감소를 의미한다. 소음은 땅 위에서만 진동하지 않는다. 석유 및 가스 탐사에 쓰이는 음파, 군사 작전용 초음파, 그리고 대형 선박이 지나가면서 내는 소리로 인해 수많은 고래들의 의사소통을 극심하게 방해함은 물론, 청력상실 심한 경우는 죽음에까지 내몰고 있다. 좀 시끄러워도 참으라고? 소음은 그 어느 환경오염 못지않게 심각한 현상이다. 이어폰을 꼽거나 눈살만 찌푸려서 될 일이 아니다. 말이 상처가 될 수 있다면, 소리도 마찬가지라고, 야생학교는 속삭인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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