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진한 커피 한 잔, 또는 시원한 아이스티가 절실한 순간. 마침 카페 하나가 눈에 띈다. 하지만 난 문을 여는 대신 꾹 참으며 발길을 돌린다. 에이, 차라리 안 마시고 말지. 이미 수차례의 경험 끝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음료를 받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간혹 나의 요구가 의외로 수월하게 관철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거의 모든 카페에서 일회용품을 최소화한 주문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투쟁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업소 안에서 마실 거니 머그잔에다 담아달라고 하지만, 아예 비치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 있다 하더라도 음료에 따라 잔의 용적이 다르다며 거절당하기도 한다. 양의 손해를 봐도 좋으니 그리 해달라고 고집을 피우면 바리스타의 진한 불쾌감을 피할 수 없다.
머그잔의 요구가 수용되었다 하더라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주문을 받은 이와 커피를 만드는 이 사이에서 이 메시지가 누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카운터 뒤 세 명에게 줄줄이 애원하고도 플라스틱 컵을 받은 적이 있다. 가장 어려운 건 뚜껑, 빨대, 그리고 컵홀더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음료를 받아내는 일이다. 극미한 기능만 수행하다가 바로 버려지는 이 자원의 의무적인 낭비를 피하는 것이 나에겐 무엇을 마시느냐 보다 훨씬 중요하다. 하지만 잘 안 된다. 그래서 난 아예 마시지 않는 편을 택한다. 목마른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나더러 유난스럽다고 한다. 평소에 일회용품을 전혀 안 쓰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리 까다롭게 구냐고 반문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종이, 플라스틱, 유리나 금속 중 적어도 한두 가지 재료는 사용하고 버리는 생활을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일회용 커피 잔에 대한 집착은 비논리적이다. 말하자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하려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절약과 환경보호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태평양 플라스틱 아일랜드
플라스틱 낭비를 운운할 것 같으면 편의점 생수도 절대 사 마시지 말아야 하고, 육식이 어떻다고 할라치면 가죽 혁대와 신발은 그 자리에서 벗어버려야 한다. 언행일치와 일관성이라는 말 앞에 모두 고개를 숙일지어다. 암 그렇고말고.
지당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일관성이 부족해도 좋은 딱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바로 환경을 보호하고 자연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렇다. 대쪽 같은 일관성이 없다 하더라도 용인될 수 있고, 다소 모순되는 면이 있더라도 좋다. 한 가지라도 아끼고, 보호하고, 경감시키려는 노력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보다는 언제나 낫기 때문이다.
보다 친환경적으로 살고자 하는 자세는 하나의 생활철학이자 신념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이 지구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느냐에 대한 정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정도를 줄이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환경의 관점에서 보면 오십 보와 백 보는 분명히 다르다. 소를 훔치건 바늘을 훔치건 둘 다 도둑이지만, 그 절도에는 규모와 여파의 측면에서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차이가 하나 둘 모여 더 큰 차이를 만들어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 각자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이다. 평소에 종이를 많이 쓰더라도 식당에서 냅킨의 사용만큼은 자제한다고 하면 그거라도 하는 것이 옳다. 물론 환경을 핑계로 생활의 모순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이다. 요는 환경에 관해서는 뭐라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이다. 일관되게 반환경적인 사람보다는, 비(非)일관되게 친환경적인 사람이 낫다.
세계적으로 야생동물 보존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극동아시아 지역은 악명이 높다.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수준의 유난스러움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의 온갖 희귀동물이 소위 아시아 전통의학의 재료에 쓰이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냥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곰에서 추출한 쓸개즙, 호랑이 뼈를 갈아서 만든 고약, 정력제와 해열제로 쓰이는 코뿔소 뿔, 그리고 고래 사냥.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우리로서는 싸잡아서 비난받는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한국도 억울할 만큼 깨끗한 나라는 아니다. 우리에게 어떤 유난을 떠는 능력이 있다면, 짐승을 하나라도 더 잡아먹는데 쓰지 말고, 하나라도 더 보호하는데 쓰는 것이 마땅하다. 환경에 해가 되는 쪽이 아니라, 득이 되는 긍정적인 유난스러움을, 야생학교는 희망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지난 칼럼===== > 김산하의 야생학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산하의 야생학교]보이지 않는 건물, 훤히 보이는 무지 (0) | 2013.10.09 |
---|---|
[김산하의 야생학교]오빤 ‘자연 스타일’ (0) | 2013.09.11 |
[김산하의 야생학교]노는 땅은 없다 (0) | 2013.08.01 |
[야생학교]공원에서조차 자연은 힘들다 (0) | 2013.07.11 |
[야생학교]인간적인 동물 (0) | 2013.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