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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을 적시는 가을비가 임박한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가을이 서늘한 공기와 우수의 기운을 대동하고 머무는 것도 잠시, 좀 즐길라치면 금세 추워져 한겨울 속에 폭 빠져 있을 것이다. 


주섬주섬 옷장에 넣어두었던 스웨터와 외투를 꺼내본다. 묵혀둔 나프탈렌 냄새가 가시고 나면 두툼한 섬유의 보드라운 촉감에서 추운 날씨의 정취가 느껴진다. 시원하고 강렬한 색으로 꾸몄던 여름 맵시도 좋았지만, 따뜻하고 그윽한 분위기의 가을·겨울 패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과일처럼, 제철의 미가 있는 법이다.


 

가을꽃 심으며 즐거운 동심 (출처 :경향DB)



문제는 바람이다. 기후변화의 탓인지, 언제부터인가 바람이 부쩍 세져서 외출 준비를 할 때 반드시 감안해야 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머리를 잘 만지고 나와도 바람의 거친 손길에 헝클어져 엉망이 되어버린다. 왁스 한 통을 다 발라 머리카락을 거의 고형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은 이상 헤어스타일을 바람으로부터 온전하게 지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미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도시의 패셔니스타에게 자연의 이런 몰지각한 비협조는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젠장, 왜 이렇게 바람이 부는 거야?


그런데 갑자기 새 한 마리가 홀연히 나타난다. 한 점 흩트림도 없이 가지런한 깃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선명한 색상은 어디 하나도 하자가 없다. 


실내생활이라고는 한순간도 하지 않는 이놈의 짐승이 대체 무슨 수로 저렇게 완벽한 외모를 유지하는 걸까? 거친 날씨에 노출된 채 평생을 살면서도 마치 고급 신사복 같은 차림새를 늘 구사하는 이들의 모습은 신기하기만 하다. 


실제로 병들거나 다친 경우가 아니라면, 상태가 엉망인 동물을 보는 일은 거의 없다. 바깥에서 아무 데나 자는 녀석들인데 아침에는 머리라도 좀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머리가 아무렇게나 ‘떡 진’ 참새를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새든, 다람쥐든, 꿀벌이든, 모두 더할 나위 없는 단정한 차림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야생동물의 아름다움은 재료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냥 생긴 대로 살면 득하게 되는 멋이지 추가적인 자원이 대거 동원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홍학의 화려한 분홍빛은 그들이 먹는 새우 등의 갑각류에서 저절로 얻는 색소이다. 인간에겐 마치 부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표범의 멋진 털은 정글 나뭇잎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도록 진화해온 그들의 유전적 자산이다. 물론 동물들도 자신을 꾸미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고양이과 또는 개과 동물은 열심히 털을 털고, 핥는 게 일이다. 영장류들은 틈만 나면 서로 털 고르기를 하고, 새들은 등 뒤쪽에 난 기름샘을 부리로 찍어 깃털에 발라 깨끗하게 관리한다. 하지만 전부 스스로의 힘을 조금 들여서 하는 ‘그루밍(grooming)’이지 온갖 외부 인프라와 물질의 투입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 어느 형형색색의 동물이라도 최소한의 자원으로 돌아가는 미(美)를 뽐낸다.


미국 베어 컨트리 야생동물 사파리 (출처 : 경향 DB)


그 다음부터 나올 얘기는 자명하다. 평생 거친 야외에 살아도 멋지기만 한 동물들 보기에 무색하게, 우리 인간은 아름다움과 위생이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자원을 소비하고도 솔직히 별로 예쁘지 않다.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온갖 화학 화장품으로 얼굴을 겹겹이 에워싸고, 거인의 머리카락을 다 감고도 남을 만한 양의 샴푸를 매일 하수구로 흘려보낸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모피를 버젓이 걸치고 멋이라며 활보하고, 아프리카의 가뭄에 대한 처절한 뉴스가 빗발쳐도 여전히 물을 물 쓰듯이 한다. 


모 여대의 학보사에서 수 년 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한 달 동안 학생 일인당 사용한 휴지의 양이 약 151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보통의 화장지 롤이 약 35미터인 걸 감안하면 어림잡아 매월 4~5통이 소비되는 셈이다. 학교에서 쓴 것만 이 정도이지 여기에 집에서 사용한 휴지, 카페나 식당에서 마구 뽑아 쓴 냅킨, 부엌에서 뜯겨져 나가는 키친롤 등등을 헤아리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자연의 폐허를 밟고 출퇴근, 등하교 하는 이들이 그리도 가꾼 나름의 ‘스타일’은, 덤불 속에서 지저귀는 새의 소박한 단아함에 비추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스타일은 엉뚱한 강남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스타일이라고, 야생학교는 믿는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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