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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늦가을 밤 서울 시내는 수능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나온 수험생들로 활기가 넘쳤다. 촛불을 든 청소년들은 공정하지 않은 사회, 특히 또래인 정유라가 받은 특혜에 분개했다. 세월호 7시간의 진실, ‘대통령의 시크릿’을 파헤친 방송 프로그램도 화제였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과 위안부 문제 졸속 합의를 지켜본 세월호 세대는 더 이상 정부와 어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 역시 ‘바쁘고 피곤한 워킹맘’이라는 핑계로 사회적 이슈에 눈감고 비겁하게 살아온 과거를 반성했다.

‘내 아이는 여객선이 아닌 비행기를 태우면 된다’ ‘수학여행을 전면 금지하면 일단은 안전하겠지’ ‘학교 밖 체험활동은 안전한 실내에서 살살하면 좋겠다’는 교육현장의 근시안적인 세월호 대책은 지리적 상상력의 빈곤을 여실히 드러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자식만 좋은 대학에 가길 바라고 다른 집 애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학부모는 외동딸을 위해 온갖 부정을 저지른 최순실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지 않은가? ‘나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생각 역시 ‘(세월호 침몰 당시) 내가 청와대에서 무얼 했든 국민들이 뭔 상관이냐’는 박근혜 대통령과 많이 닮았다. 아기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7시간 보모가 사라지면 기저귀가 축축해지고 배고픈 아이의 울음소리로 온 집이 난장판이 된다는 것을.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희생자가 많았던 단원고가 경인교대 학생들의 실습현장인 안산에 있었기에 세월호 참사의 충격은 나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대학에 처음 부임했을 때 선배 교수님들 눈치 보지 않고 지리교육을 제대로 강의할 권리를 강력하게 요구했더라면’ ‘첫 제자가 수학여행을 주제로 논문을 쓸 때 사전 안전교육 내용을 포함시켜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도했더라면’ ‘연수를 통해 수학여행 중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위험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경기·인천 지역에서만이라도 확산시켰더라면’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을 텐데. 후회와 자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많이 괴로웠다.

무력했던 나 자신을 속죄하는 심정으로 그간 지리학자로서 한국 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았다. 청소년 책을 쓰고 언론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해외연구년도 포기하고 미친 사람처럼 전국을 답사하며 지역사회와 연계한 100개의 ‘진짜’ 창의적 체험활동 프로그램 개발에 모든 것을 쏟았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 교수들, 현장 교사와 학생들, 지역 주민들의 헌신으로 돈 많이 들이지 않고도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즐겁게 배울 수 있는 자유학기용 교육 프로그램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실험되었다. 아이들이 컴퓨터게임을 하듯 실외에서 뛰놀며 다양한 인문·자연환경 속에 내재된 위험요소를 모바일 지도에서 발견하고 없애는, 나름 혁신적인 체험형 안전교육도 시도했다. 포켓몬고보다 더 먼저! 문화·예술계 지인과 강화군청의 도움을 받고 사비를 털어 교육용 영상까지 제작했지만 경직된 교육계와 관료주의에 부딪혀 당장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거짓말과 국정농단도 실망스럽지만 한국 교육계의 위선과 자기모순도 심각한 수준이다. ‘야간자율학습’이라면서 학생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교사가 왜 필요한가? 자유는 오히려 부담(심지어 ‘고통’)스럽고 상급자의 지시를 받는 게 편하다는 교사가 자유학기제를 기획하고 주도하기도 한다. 학습지 들고 공공시설을 방문해 빈칸을 메꾸는 식의 현장학습과 틀에 박힌 형식적 견학이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둔갑한다. 단순한 교과서 내용만 단기연수로 대충 배우고 전문적인 야외조사 경험이 전무한 비전공 교사가 가르치는 지리는 지겨운 암기과목으로 전락했다. 창의·인성교육이 중요하다면서 정작 교육의 전 과정을 압도하는 ‘수능’과 교사를 선발하는 ‘교원임용고시’는 여전히 정답이 하나인 지식과 암기력 위주 시험이다.

비록 세월호의 흉터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웅크려 있지 않고 스스로 광장에 나왔다. 불법적인 줄기세포 시술을 받지 않아도 새살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흉터는 일종의 축복이다.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커질 때마다 그 흉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되니까.’ 파울루 코엘료의 잠언이다. 시민들은 대통령과 정치권에 대한 분노를 개혁의 에너지로 전환할 만큼 현명하고 과감해졌다.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을 전자촛불, 치킨촛불에 이어 하야촛불 배지까지 등장했다. 광화문은 ‘진부한 투쟁’을 넘어 남녀노소, 심지어 외국인도 동참하고 싶어 하는 ‘창조적 축제’의 장이 되어가는 중이다. 쓸쓸한 11월을 ‘모두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명명한 미국 체로키 인디언의 위로처럼.


■지리꿀팁

11세 영국 소녀 틸리는 태국 해안으로 몰려오는 쓰나미의 전조를 알아채고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영웅이 되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배운 지리지식과 공간적 의사결정력 덕분이었다. 영국에서는 지도와 야외답사를 통해 체계적인 안전교육을 시행하여 전 세계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재난에 대응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국내 학교의 안전교육은 실내에서 안전구호 외치고 인공호흡법 배우고 수영장에서 생존수영을 익히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위급한 상황에서 수영을 아무리 잘해도 육지가 아닌 더 깊은 바다로 향한다면…. 상상만 해도 오싹해진다.

김이재 문화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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