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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고 있는 동안엔 삶이 중단된다면서요? 어찌 성공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겠습니까? 꽃을 피워보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데. 그러나 꽃이 지지 않아도 열매를 맺지 못하지요? 성공하고 있는 동안엔 삶이 중단된다는 안셀름 그륀의 말은 성공을 좋아하고 찬사에 집착하는 한 고유한 삶의 깊이에는 이를 수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고유한 삶은 성공과 찬사의 이면, 명치 끝에 걸려 소화되지 않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시작합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4명의 처를 얻었고, 아이도 많이 낳았고, 재산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는 성공했습니다. 더구나 라반과의 관계에서만 본다면 그는 정말 내려놓은 자, 인격자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일했는데, 라반은 그를 속이고 사랑하지 않는 레아를 주었습니다. 그것도 기막힌데, 또 라헬을 주는 조건으로 7년을 일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꾀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라반의 살림을 관리해 주었고 불려주었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재산을 주지 않으려고 꾀를 썼는데도 야곱은 묵묵히 속아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자가 됐습니다. 셈법 너머 보이지 않는 힘이 야곱을 진득한 사람으로 만든 거지요. 이제 야곱은 돌아갈 때가 됐습니다.

고갱, ‘설교 후의 환영’, 72.2×91㎝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형 에서입니다. 고향에 가야 하는데, 그래야 진정 자기 집을 세우는데, 그러자면 고향을 지키고 있는 형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 야곱은 평생 덮어두기만 했던 자기의 그림자, 형 에서를 대면해야 합니다. 그 대면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는지 야곱의 기도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부디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형이 와서 저를 치고 아내들과 자식들까지 죽일까 두렵습니다.”

서로 갈등하고 미워했던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갈등 아래 흐르는 형제애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는 갈등을 덮어두고 도망만 쳐서는 안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밤새워 천사와 싸우는 야곱의 씨름은 바로 두려움으로 남아 있는 시간과의 대면이 아닐까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두려운 것도, 불안한 것도 없이 힘을 빼고 살 수 있었던 야곱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 그래서 늘 명치 끝에 걸려 있는 것, 그것은 바로 형이었습니다. 당신의 명치 끝에는 누가 혹은 무엇이 걸려 있습니까?

고갱의 그림, ‘설교 후의 환영’입니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에 힘을 보태며 기도하고 있는 여인들이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환영을 보고 있는 흰 두건의 전통적인 여인들을 저리도 선명하게 그려낸 건 바로 고갱이, 그녀들이 바라보고 있는 야곱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인 거겠지요? 고갱이 야곱처럼 생사를 걸고 싸워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이 더 가짜 같지 않나요? 증권 브로커라는 직업을 버리고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가난한 화가로 다시 시작하고자 했던 고갱을 상상해보십시오. 아무리 화폭에 담고 싶은 세계를 확신하고, 그 세계를 담을 수 있는 재능을 확신한다 해도 스멀스멀 불안이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불안과 동경이, 신비와 현실이 뒤섞여 고갱 스스로가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천사와 싸운다는 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자기의 전 존재를 던지는 거지요? 야곱을 천사와 씨름하게 만든 에너지인 그림자가 바로바로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면 고갱을 씨름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불안한 삶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씨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내면의 어두운 측면입니다. 해결할 힘이 없어 모르는 척 견디고만 있었던, 인정할 수 없어 아예 잊고 있었던 삶의 그림자가 있지요? 때가 되면 그런 그림자를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에서를 대면해야 하는 야곱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내야 하는 고갱처럼. 그림자를 대면하는 데 실패하면 어느 순간 그림자가 내 삶에 참을 수 없는 균열을 일으키고 제대로 사는 일을 훼방 놓습니다. 선선한 줄 알았던 내가 이리도 집착이 많은 사람이었다니, 당당한 줄 알았던 내가 이토록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따뜻한 줄 알았던 내가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었다니, 이렇게 ‘나’에게 놀란 적이 없나요?

때로는 화가 올라오기도 하고, 초조와 불안이 ‘나’를 감싸기도 하지요? 감싸고 올라오는 것을 억누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폭발합니다. 억누를 것이 아니라 ‘자각’해야 합니다. 화가 난 나를 자각하고 나면, 화에 끌려다니지 않고, 화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불안한 나를 자각하고 나면 내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불안이 지시하는 것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친구처럼 친해져 내 마음과 소통하게 됩니다. 우리가 남과 소통하지 못하는 건 결국 자기 마음과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요?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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