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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유·초·중등교육 부문은 늘 시끄럽다. 지난해부터 올해 중반까지는 대입제도 개편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더니 요즈음은 사립유치원 문제로 분주하다. 그 외에도 늘 자잘한 문제들이 벌어져서 교육현실이 참 절망스럽다는 비판의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유·초·중등교육 부문은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으니 회복 가능성이 큰 환자라고 할 수도 있다. 울퉁불퉁 불만을 제기하는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치유력이 있는 거라고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환자이다. 내가 보기엔 고등교육이야말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환자이다.

얼마 전 한편으론 흥미롭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끔찍하기도 한 통계를 보았다. 교육개발원에서 2016년 기준으로 대학원, 전문대, 4년제 대학의 학과명이 몇 개나 되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는 대학원 9664개, 전문대학 6884개, 4년제 대학 1만2359개였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은 200개 정도 된다. 4년제 대학 200개 중 서로 이름이 다른 학과가 1만2359개나 된다니 참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이 과연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학과를 개설할 만큼 발전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교육개발원 조사에 의하면 1만2359개 학과를 가르치는 내용으로 분류해보면 약 121개로 압축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한 학과에 100개 이상의 다른 이름을 붙여놓은 셈이다. 예컨대 어느 대학에선 국문과가 다른 대학들에선 문화콘텐츠학과, 디지털콘텐츠학과, 스토리텔링학과 등으로 불리는 식이다. 대학들은 왜 똑같은 내용의 학과에 이렇게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는 고등교육 문제의 아픔과 비밀이 숨어 있다.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학령인구의 감소로 학생 모집이 어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상위권 대학이야 학과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학생들이 오니까 국문과라고 붙여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학생 모집에 곤란을 겪는 대학은 국문과보다는 문화콘텐츠학과, 스토리텔링학과 같은 이름이 트렌드에도 맞고,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 것도 같아 학생을 끌어들이기가 쉽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작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는 1만2359개의 학과명은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른 중요한 이유는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서다. 예컨대 문화콘텐츠를 강조하는 예산지원이 있으면 그 평가기준에 맞추기 위해 국문과의 이름을 곧장 문화콘텐츠학과로 바꾸고 학과의 목적을 프로젝트에 맞게 만들어 서류를 낸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단기적이다. 예산 지원 담당자가 바뀌어 이번엔 디지털 시대를 강조하는 프로젝트 예산지원을 내면 또 문화콘텐츠학과를 디지털콘텐츠학과로 바꾸어 서류를 낸다. 이러한 대학의 모습은 상아탑, 학문의 전당, 자율과 자치의 원리 등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참으로 비참해 보인다. 도대체 왜 대학은 이런 수모를 감수하면서 예산지원에 목을 매는 것일까?

반값 등록금 정책은 교육 불평등을 완화하고 대학교육의 공공적 성격을 높이려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반값 등록금으로 발생한 재정결손을 메워주는 지난 정부의 예산지원 방식에 있었다.  이 방식은 대학이 종합적인 자기계획을 수립하여 통으로 심사를 받고 적절한 수준에서 통으로 지원하는 방식이 합당할 것이다. 그래야만 대학의 자율과 자치가 산다. 그런데 지난 정부는 그러지 않고 수많은 목적사업으로 잘게 쪼개어 예산지원을 하고 사업 하나하나마다 심사기준을 엄격하게 제시해 대학을 평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대학은 이 예산지원을 받지 않으면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그 평가기준에 맞추기 위해 학과 명칭을 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예산지원을 위한 평가기준의 기본적 원칙은 아마도 기획재정부가 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평가기준을 구체화하는 건 교육부에서 했을 것이다. 기재부가 세우는 기본 원칙은 아무래도 경제적 효율성에 치우칠 수밖에 없고 대학사회의 특성에 잘 안 맞을 가능성이 크다. 대학사회의 특성을 충분히 변론·옹호하지 못한 교육 관료의 책임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취업률을 기본원칙으로 강조하면 예체능계나 인문사회계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고, 그런 식으로 대학사회는 조금씩 무너져 왔다. 이제는 전 정부의 예산지원 방식, 그와 연동된 대학평가 관행이 새 정부에서도 지속되고 있는데 그런 관행에 너무 익숙해져 이제는 비명을 지를 줄도 모른다.           

앞에서 나는 유·초·중등교육이 늘 시끄럽지만 그래도 내부 동력이 살아있어 회복 가능성이 높은 환자와도 같다고 했다. 아마도 유·초·중등교육이 갖는 이러한 힘은 부족하나마 그간에 진전된 교육자치 분권에 힘입은 것이다. 진정 창조적인 동력은 자율과 자치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열어갈 창조적 동력을 얻고 싶다면 반값 등록금으로 인한 재정결손을 보전하기 위한 정부 예산지원과 평가 방식을 대학의 자율과 자치가 가능한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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