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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해본 사람들은 체력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다.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까지 고통이 느껴지도록 몸을 훈련해야 체력의 한계를 조금씩 넘어설 수 있다. 가슴이 뻐근해질 때까지 달린 다음에야 폐활량이 커지고, 근육이 타는 듯한 고통이 지나간 다음에야 근력이 는다. 고통스러운 지점을 돌파하지 않고 몸이 편안한 상태에서만 운동하면 현상유지는 될지 몰라도 체력의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정신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론이 적용된다. 인간의 정신도 고통이나 시련을 통해 성장한다. 힘들고 아파 꼭 죽을 것 같은 지점을 넘어서야만 정서의 폐활량도 커지고 마음의 근력도 는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대체로 고통의 경험 앞에서 주춤거리는 듯 보이는 때가 있다.

대학교 학생상담실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에 의하면 대학생들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진로와 사랑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젊은이들도 사랑에 대한 고민을 많이 토로한다. 이별 후 다시 사랑하기 두렵다거나, 남자 친구가 홀연히 떠난 후 어떤 남자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예 사랑의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젊은이도 있다. 사랑을 해봤더니 너무 아파 앗 뜨거라 하는 심정으로 물러섰다고 말하는 젊은이도 있다. 그 고통이 예상을 넘어서는 수치여서, 그때까지 맛본 적 없는 통증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랑이 왜 그렇게 아프고 힘든지 묻는다.

사랑을 하면 당연히 그 뒷면 감정이 폭발하듯이 터져나온다. 그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걸까 하는 불안감, 다른 이성을 바라보기만 해도 솟구치는 질투심, 기대한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이는 분노를 경험한다. 그 감정들은 그대로 고통이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질투를 이겨내고 불안을 다스리면서 계속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작동시키는 일이다.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이 연속된다. 그러니 처음 사랑을 경험하는 젊은이들이 그 어려움에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잘못이 있다면 사랑이 오직 달콤하고 행복한 것이라는 환상을 증폭시킨 문화나, 사랑이 본래 고통을 감수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어른들에게 있을 것이다.

직장생활에서도 고통과 관련되어 똑같은 문제가 이어진다. 어려운 시대를 힘들게 살아왔다고 여기는 기성세대의 눈에 요즈음 젊은이들은 작은 어려움에도 회사를 그만두는 듯 보인다. 상사가 잘못을 지적하거나 야단치면 그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느끼는 젊은이들도 있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 배우고, 오류를 개선하면서 능력을 향상시킨다. 상사의 말에서 지혜를 얻는 게 아니라 박해감을 느끼다니, 그들은 얼마나 고통에 대한 내성이 없는 걸까 싶다. 그런 이들은 사회 초년생이 직장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적응이라는 사실도 잘 수용하지 못한다. 조직에 적응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삼년쯤 마당을 쓸거나 군불을 때는 것처럼 단순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에 자신을 투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전의 장인들은 전문 기능을 전수해줄 제자에게 한 삼년 단순 무용한 노동을 시켰다. 그 하찮은 일을 성심으로 소중히 해낼 때에야 마음이 순복되어 귀한 기술을 담을 그릇이 된다고 여겼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한 삼년 군불 때는 일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입는 것처럼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안전한 길 알려주기보다
그들이 도전·모험 뛰어들 때 묵묵히 지원해줘야


심리치료의 핵심에도 고통을 감당하는 일이 있다. 우리가 마음이 아픈 이유는 충격적 사건이나 상실을 경험한 후 그에 따른 고통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은 외면해둔 그 고통을 다시 체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인정 지지 단계의 달콤함만 취하고 무의식을 직면하는 고통은 회피한다. 치료자가 내면의 잘못된 신념이나 부정적 감정을 직면시키려 하면 그 지점쯤에서 치료가 중단된다. 그런 이들은 치료자의 말에 모욕감을 느꼈다거나, 치료자가 자기를 판단하는 게 불쾌하다고 말하면서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모욕감이 해결해야 하는 나르시시즘이고, 불쾌감이 불안과 분노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치료자에게 투사한다.

젊은이들이 고통 앞에서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그들 내면에 있는 불안과 나르시시즘 때문으로 보인다. 그들은 고통이 정신을 해체시키고 시련이 생을 무너뜨릴까봐 두려워한다. 되도록 고통을 피해 쉽고 안전한 길로 가려 한다. 그것 역시 부모 세대가 물려준 태도일 것이다. 어려운 시대를 힘들게 통과한 부모들은 자녀에게만은 자기가 경험한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자녀들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해왔다. 안전한 선택, 위험하지 않은 길을 찾아내 자녀를 안내했다. 그 과정에서 자녀들은 자잘한 어려움을 경험하고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마음의 힘을 키울 기회를 잃었다. 부모는 자녀가 고통받을까봐 두려워하면서 바로 그 불안감을 자녀에게 물려준 셈이다.

인류의 지혜가 담긴 신화를 참고하자면, 신화의 주인공들은 도전과 모험, 그에 따른 시련과 고통을 통해 영웅이 된다. 각 문화의 성인식은 소년이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고통을 경험시킨 후 삶의 비전을 전수하는 의례이다. 사랑과 용기, 관대함을 가진 성인식 집행자들은 젊은이가 고통받는 과정을 지켜보고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문화의 통과의례에서도 청년이 혼자 고통받고 스스로 어른이 되는 경우는 없다. 길을 안내하고 비전을 전수하는 어른이 있어야만 젊은이는 마음놓고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밟는다. 그렇게 삶의 비전을 전수받은 젊은이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 다음 세대를 도울 수 있다.

똑같은 공식이 지금 이곳의 삶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오직 실수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며, 시련과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성장한다. 고통은 인간을 더 빨리 의식적으로 만든다.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격을 확장시키고, 그 경험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내면 공간을 키운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안전한 길을 가도록 조종하는 어른이 아니라, 그들이 도전과 모험 속으로 뛰어들어 고통을 감당할 수 있도록 묵묵히 지원해주는 어른들이 아닐까 싶다. 어른이 먼저 사랑과 인내, 관대함 등을 갖추고 있어야만 젊은이들에게 그것을 물려줄 수 있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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