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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봄학기에 ‘진보와 보수’라는 교양강좌를 열었다. 500명이 넘는 학부생들이 신청한 만큼 나름 신경쓰면서 강의를 진행했다. 강좌 말미엔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이상돈 중앙대 교수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했다. 강의를 통해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20대들의 정치적 감각이었다. 20대들은 대체로 진보적이긴 하지만 진보적 성향과 보수적 성향, 그리고 이념적 경향과 탈이념적 경향이 공존한다.

대선의 해를 맞이해 새삼 생각해보는 것은 이념의 역사다. 세계사회의 이념구도는 진보의 시대(1950년대~1970년대 중후반)와 보수의 시대(1980년대~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거쳐 새로운 전환의 시대에 들어와 있다. 미국·일본에는 진보적 정부가, 독일·영국에는 보수적 정부가 존재하는 현실을 지켜볼 때 어느 이념이 우세하다고 주장하긴 어렵다. 다만 보수가 내세운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한 만큼 정치적 국면은 진보에게 유리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에선 민주화 시대 이후 10년을 단위로 보수적 정부와 진보적 정부가 교체돼 왔다(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진보적 정부로 볼 수 없다면, 중도개혁 정부라고 봐도 좋다). 주목할 것은 정권교체에서 나타나는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이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이를 증거한다. 노무현 후보가 내건 ‘낡은 정치 청산’이나 이명박 후보가 내건 ‘경제 살리기’에 대한 국민 다수의 열망은 집권 말기에 모두 환멸로 귀결됐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이상돈 중앙대 교수, 김호기 연세대 교수 ㅣ 출처:경향DB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구적 흐름과 국내적 흐름이 갖는 유사점 및 차이점이다. 최근 지구적 흐름이 갖는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이다. 신자유주의는 위기가 분명한데, 유럽 경제위기가 보여주듯이 그 전망이 극히 불투명한 암중모색이 계속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적 사고다. 보수가 진보적 정책을 추진하고 진보가 보수적 정책을 수용하는 탈이념적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국내적 흐름은 사뭇 다르다. 후발 산업화 국가인 우리 사회는 뒤늦게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쳐 이제 복지국가 시대의 문턱 위에 올라서 있다. 선발 산업화 국가가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에 복지국가를 일궜다면, 우리 사회는 상이한 시대적 환경인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복지국가를 이뤄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를 특징짓는 것은 저성장 시대다. 제로성장에 가까운 구조적 강제 아래 지속가능한 재정정책과 시대적 요구로서의 복지정책 간의 최적 조합을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여기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계경제의 위기, 돌이키기 어려운 저출산·고령화 경향과 이와 연관된 노동시장의 변동,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참여민주주의 확산 및 문화의 군도화(群島化) 경향이 결합함으로써 우리 사회 이념지형은 보수 대 진보라는 정치적 대립의 이념화와 기존 구도로부터의 탈이념화가 동시에 진행돼 왔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이념과 탈이념의 이러한 이중 구도다. 문제는 포스트 신자유주의적 정책 콘텐츠를 마련하는 데 기존 이념 구도의 해법이 갖는 강점과 한계에 있다. 지구적 수준의 탈이념적 흐름과 국내적 수준의 복지국가 구축이라는 진보적 흐름 사이에 우리 사회는 놓여 있으며, 상반된 이 두 경향을 적극 고려한 국가전략을 추진하지 않는다면 차기 정부는 또 한 번의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시대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반을 둔 포스트 신자유주의 국가전략을 모색하는 시대정신 탐구가 역시 문제의 핵심이다.

대통령의 권력이 국민들로부터 위임된 만큼 대선 후보들은 국민들의 질문에 응답할 의무가 있다. 박근혜·정몽준·김문수든, 또 안철수·문재인·손학규·김두관이든 대통령을 꿈꾼다면 묻고 싶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우리 사회를 어디로 이끌려고 하는가. 새롭게 출범할 정부는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와 무엇이 다른가. 당신들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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