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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이다. 동시에 언어는 정치의 집이기도 하다. 언어 또는 담론을 통해 정치가는 시민들의 열망을 대변하며 지지를 결집한다. 정치에서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 사례로 손학규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의 슬로건인 ‘저녁이 있는 삶’을 들 수 있다. 이 말은 위기의 벼랑에 내몰린 시민 다수의 소박한 희망을, 민생·복지·경제민주화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감성과 공감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지난 2007년 대선을 주도한 말은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슬로건인 ‘경제 살리기’였다. 경제 살리기는 복합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편에선 노무현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보수적 비판을 겨냥하고, 다른 한편에선 2000년대 중반부터 유행한 ‘부자 되세요’의 정치적 열망을 담고 있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경제 살리기가 얼마나 허구였는가는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동시에 정치의 집으로서 언어가 갖는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경제 살리기의 절정은 2008년 총선에서 나타난 ‘욕망의 정치’다. 욕망의 정치란 당시 뉴타운과 특목고 열풍으로 상징되는 투표 성향, 실현되기 어려운 욕망에 따른 투표 행위를 말한다.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미래의 기대에 표를 던지는 욕망의 정치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말한 바 있는 채워지기 어려운, 아니 채워질 수 없는 욕구를 표출하는 행위였다는 점에서 비극의 정치였다.

 

민주통합당 손학규 상임고문이 정책발표회를 갖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욕망의 정치가 가져온 사회적 결과다. 욕망의 정치는 가치보다 욕망, 공공성보다 사익성, 국가보다 시장을 특권화하는 세계화 시대 신자유주의 정치의 전형이다. 이 욕망의 정치는 ‘경쟁에 의한, 경쟁을 위한, 경쟁의 시민사회’와 정확히 대응한다. 다른 이와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는 적응 압박은 시민사회 내 까닭 모를 불안과 공포를 강화시키고 일상화시킨다. 욕망의 정치가 가져온 개인적 내면 풍경이 다름 아닌 ‘멘붕(멘털 붕괴)의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멘붕이란 마음이 무너졌다는, 젊은이들의 어법으론 정신줄을 놓거나 바닥을 쳤다는 의미다. 멘붕이 우리 시민문화의 한 경향을 포착한 개념이라면, 그 원인을 물론 욕망의 정치에만 귀속시킬 순 없다. 외려 물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로 대변되는 화폐 및 신체에 대한 무한 숭배와 이에 따른 개인적 좌절이 멘붕의 사회적 원인일 것이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최근 불어온 ‘멘토 열풍’, ‘힐링 열풍’이 멘붕 현상과 정확히 짝한다는 점이다. 멘붕에서 힐링으로 가기 위해선 개인적 태도 변화와 사회적 구조 개혁이라는 이중의 과정이 요구된다. 최근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책이나 법륜 스님, 황창연 신부 강연에 대해 시민들의 관심이 높은 것은 이들의 말과 언어에 멘붕이 가져온 상처를 보듬는 개인적 태도 변화에 대한 공감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구조적 개혁이다. 멘붕의 사회적 원인이 치열한 입시경쟁, 만성적 청년실업, 퇴출의 공포, 높은 사교육비, 불안한 노후에 있다면, 이를 구조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선 멘붕이 제대로 치유될 수 없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구축을 통해 이명박 정부에서 훼손된 공공성과 사회 정의를 회복할 수 있는 구조적 프로그램들을 제시하는 것이 현재 대선후보들에게 부여된 일차적인 과제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지배와 통치의 관점이 아닌 소통과 위로의 시각에서 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할 수 있는 공감의 언어다. 우리 정치에 이런 공감의 정치적 상상력이 결여돼 있다는 것은 나만의 판단이 아닐 것이다.

이 정치시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첫 번째로 다룬 주제는 ‘우리를 구원할 사랑과 정치’였다. 멘붕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사랑의 회복과 정치의 복원이 요구된다. 비정한 권력투쟁을 넘어 따듯한 위로, 열린 소통,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 바로 이것이 욕망의 정치를 대체할 ‘힐링의 정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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