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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타인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좋아하는 지식인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이른바 최애(最愛)하는 지식인은 역사학자 토니 주트(Tony Judt)다. 영국에서 태어난 유대인 주트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했고 미국 뉴욕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전후 유럽에 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포스트 워: 1945~2005> 등의 저작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주트는 학문적 탐구는 물론 대중적 계몽을 중시했다. 시대의 불의에 맞서 공론장에서 사회 정의를 위한 발언들을 서슴지 않았다.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지성사적 위상은 독특하다. 그는 반신자유주의자이자 반공산주의자였다. 지난 20세기 후반 서구 신자유주의가 낳은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격렬히 비판했던 동시에, 동구 공산주의가 가져온 인간적 자유와 민주적 공론장의 훼손 역시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평등과 자유의 가치를 조건 없이 사랑했던 ‘완고한 사회민주주의자’였다.

주트가 남긴 저작 가운데 가장 마음 시린 저작은 <20세기를 생각한다>(2012)다. 자신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루게릭병에 걸렸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젊은 동료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와 대화를 나누어 책으로 내놓은 게 이 저작이다. 이 책은 격동의 20세기를 가로질러온 주트의 역사학적·윤리학적 자서전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그리고 케인스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치열하게 싸우고 숨 가쁘게 이어진 역사가 지난 20세기였다는 게 주트의 진단이다. 이 저작에서 그가 도달한 결론은 명쾌하다.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등의 삶을 위해선 정치가 중요하고, 그 정치는 사회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누구나 동의할 필요는 없다. 주트의 기대는 ‘소망적 사고’에 가깝다. 서구의 경우 현재 정작 목도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와 좌우를 막론한 포퓰리즘의 발흥이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21세기에 대한 주트의 관찰이다. “우리는 공포의 시대에 다시 진입했다. (…) 성공적인 직업 경력을 쌓은 뒤 은퇴하여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의 확실성은 사라졌다.” 주트는 21세기가 열린 후 등장한 미지의 이방인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미지의 미래에 대한 공포를 환기시킨다. 정부를 위시해 그 누구도 더 이상 인류의 개인적 행복을 보호하기 어려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주트의 전망이다.

한 역사가에 대한 개인적 추억이 다소 길어졌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주트의 전망이 21세기가 진행돼 오면서 더욱 강화돼 왔다는 점이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정치적 극단주의의 부상, 혐오와 차별 문화의 확산, 그리고 공론장을 뒤흔드는 가짜 뉴스의 범람이 21세기 지구적 풍경의 현주소이다. 이 현상들을 관통하는 정서가 바로 ‘공포’다. 문제는 이 공포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떠안은 정치가 정작 그 공포를 선동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사회통합을 더욱 곤경에 빠트리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지구적 현실은 우리 시대를 더욱 비관적으로 독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

돌아보면, 1919년 3·1운동에서 시작한 지난 100년 우리나라 현대사는 ‘한국적 시간’과 ‘지구적 시간’의 격차를 줄여온 역사였다. 우리에게 중심을 이룬 한국적 변동의 시간과 변방에 놓인 지구적 변동의 시간이 가까이 다가와 중첩됐고, 1997년 외환위기를 거쳐 21세기에 들어와선 그 두 시간 사이의 거리가 이젠 사라졌다. 당장 2008년 금융위기, 미·중의 갈등과 협력, 그리고 ‘미투 현상’에서 볼 수 있듯, ‘지구적 현상’은 곧 ‘한국적 현상’이었다. 사회변동에서 안과 밖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2019년 올해 우리 사회에 부여된 과제 중 하나는 과거 100년의 역사를 성찰하고 미래 100년의 전망을 모색하는 데 있다. 앞서 말했듯, 불평등, 극단주의, 혐오와 차별, 그리고 위기의 공론장은 세계사회의 현재이자 한국사회의 현재다. 지난 100년 ‘압축 발전’의 결과 우리 사회에선 이 현상들이 더욱 또렷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새로운 미래 100년의 설계에는 이 문제들에 대한 지속가능하고 실현가능한 해법들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제 다음주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으로 시작해 지난 100년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행사들이 잇달아 열린다. 우리 사회를 연구해온 사회학자로서 나는 올해가 ‘기억에서 미래로’ 가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길 소망한다. 국가적 차원은 물론 지구적 차원을 시야에 넣은 미래 100년의 비전 및 전략에 대한 국민적 토론이 풍성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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