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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 ‘우렛소리’(<레이 브래드버리>, 현대문학, 2015)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이런 하찮은 것 하나 때문에! 고작해야 나비 한 마리인데!” 2016년에 있었던 일련의 사태부터 2017년의 탄핵 인용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돌이켜보다 문득 저 대목이 떠올랐다. 처음에 일이 불거졌을 때, 박근혜를 비롯한 청와대 비서진은 ‘하찮은 것’의 입만 틀어막으면 될 거라 낙관하거나 ‘고작해야 나비 한 마리’이니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나비효과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날씨 변화를 일으키듯, 미세한 변화나 작은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정운호에서 출발한 법조 비리는 우병우와 정유라를 거쳐 소용돌이가 되었고 최순실로 인해 급기야 태풍으로 변모했다. 언론의 특종, 노승일과 고영태의 증언은 태풍이 금세 지나가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암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누리꾼이 업로드한 동영상은 ‘법꾸라지’라 불리는 김기춘의 증언이 거짓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태풍에 맞서지 않으면 더 크고 지독한 태풍이 불어올 것이 불 보듯 빤했다. 이에 시민들은 불씨를 품고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나비 한 마리’가 아니었다. 광장은 수백만마리 나비들로 가득 찼다.

실제로 ‘우렛소리’에서는 중생대의 나비 한 마리 때문에 대통령 선거 결과가 바뀌어 히틀러 같은 전체주의자가 당선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기상천외하고 어찌 보면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상상이 소설 속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발표된 지 64년이 지난 2016년, 대한민국에서 더한 사건들이 줄줄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아무도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를, 하지만 누구나 알았어야 할 그 일들이. “상상하라, 그 이상을 보여주겠다”라는 말이 그대로 현실에 적용된 셈이다. 막장 드라마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드라마는 안 보면 그만이지만,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채널을 돌릴 수 없는 게 다름 아닌 삶이다.

2016년 12월9일,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2017년 2월17일, 우리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는 장면을 보았다. 삼성 창립 이래 총수가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무 차례 진행된 촛불집회에 약 1600만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였다. 그리고 2017년 3월10일, 박근혜가 파면되었다. 드라마는 일차적으로 막을 내렸다. 매주 토요일, 생방송으로 방영되는 드라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비들이 한데 모여 팔랑거렸다. 촛불과 나비는 닮은 데가 있다. 촛불이 꺼지지 않기 위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늘거리듯, 나비 또한 살기 위해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한다.

나비효과가 본디 과학 이론이었으나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광범위한 용어가 된 것처럼, 우리는 이제 한 명 한 명의 시민이 잠재적인 나비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우리가 해냈다”나 “우리가 이겼다”라는 구호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힘없는 존재들에게 승리의 경험은 중요하다. 그것은 ‘다음’을 꿈꾸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나비가 모이고 모여 나비떼가 됨으로써, 실낱같은 희망이 실타래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나비효과가 가시적 성과로 드러나려면 무수한 나비들이 필요하다.

앞으로 더 많은 나비들이 필요하다. 날갯짓은 더 요란해져야 한다. 극적인 드라마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 믿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서. 서두에 언급한 ‘우렛소리’는 이렇게 이어진다. “나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훌륭한 곤충이었다. 작은 동물이지만, 균형을 흐트러트려 작은 도미노의 줄을 무너트리고, 이어서 큰 도미노를,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도미노까지, 시간의 물결 속에서 모든 것을 무너트릴 수 있는 존재였다.” 사회의 균형추이자 지렛대라는 점에서, 시민도 그런 존재다.

우리는 무너진 도미노를 차근차근 다시 세울 것이다. 나비는, 나비들은 이제 막 날기 시작했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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