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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얼음을 뚫고 나와 ‘날 잡아 잡수’하고 엎드렸다는 겨울 잉어와 더불어 천하의 효자나 구할 수 있었던 눈밭의 딸기는 이제 겨울이 제철입니다. 부모님들도 더 이상 딸기 정도로 효자를 시험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래도 유난히 추운 이번 겨울, 곱이나 더 들어가는 기름을 쳐다보며 새벽마다 하우스로 나가 온도를 점검하고 마음 졸이는 심정을, 딸기를 잡수시는 분들은 좀 알아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극복해야 얻어지는 맛이니 얼마나 욕보겠습니까.


농한기라고 한가한 농민은 별로 없습니다. 농사일이 없으면 김 양식장에 취업을 하거나 집 짓고 창고 짓는 데에 날일이라도 다닙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동네 한 바퀴씩 걸으며 운동도 하고 회관에 모여 윷도 노십니다만, 노는 사람도 그렇게 편해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주변 논두렁대학의 농업, 농촌 박사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농한기를 맞아 충북 청원군 내수읍 노인회관에서 노인들이 '띠자리'를 만들고 있다 (출처: 경향DB)



첫 번째 주장은 ‘비닐 발명론’입니다. 비닐은 제초작업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비로소 겨울철 특수 재배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땅을 죽이고 에너지를 너무 투여한다는 비판 정도는 “너 이리 와서 니가 풀 한번 매봐라”하면 수그러들 것이고 그렇게 심오한 문제를 제기했다가는 겨울에 딸기를 먹는 오천만 국민이 한꺼번에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농사는 철이 없어졌고 농민 역시 언제든 투입될 수 있는 농자재의 신세로 격하된 배경이 바로 비닐의 발명이라는 주장입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사회 진보를 보장하는가에 대해 토론하다가 누군가 잘 노는 것이 진보인지, 잘 먹는 것이 진보인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진보인지를 묻자 모두 딴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는 ‘태생론’으로 “일할 때가 제일 행복한 거야”하는 주장입니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인데, 토론보다는 술과 안주를 이어가는 것에 훨씬 충실한 쪽입니다. 줄어든 농업소득과 이로 인해 겸업을 해야만 유지가 되는 현실도 ‘내가 더 열심히 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논리를 떠나 점점 이 친구들이 부러워지고 있는 것이 추세라면 추세고,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세 번째 주장의 이름은 ‘김정은 책임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IMF를 힘겹게 넘어 21세기로 접어든 겨울입니다. 10년만큼은 더 예뻤던 배우 김정은이 한 카드회사 광고에 등장합니다. 빨간 옷에 하얀 목도리를 두르고 누구든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넵니다. “여러부운~ 부자되세요”하며 나를 보고 웃을 때, 게임은 이미 끝났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때마침 “이 정도면 우리도 괜찮은 거 아냐?”하고 방심한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연말연시, 명절, 친구, 친척들에게 “부자되세요”를 합창합니다. 돌잔치에서 아이에게도, 팔순잔치를 하는 할아버지에게도 “부자되세요”라고 말하면 모두가 “하하”하고 웃습니다. “그럼그럼.”


이처럼 시대정신을 선도하고 분명한 의도를 관철시킨 인사말은 전무후무합니다. 혹자들은 2012년 선거가 보수대연합의 승리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연합은 21세기 초반 이미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10대 재벌과 여야 가릴 것 없는 고위층들은 IMF 구제금융의 위기를 ‘이런 식으로 넘어도 되는구나!’라고 감탄하며 이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도록 쐐기를 박아둘 때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합니다.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21세기의 시대정신과 대중화’라는 주제로 각종 회의를 열고 마침내 3박4일의 합숙을 거쳐 모종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부자되세요’가 나온 배경은 이 정도는 되어야 설명이 가능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부자 되세요' 라는 새해 덕담이 새겨진 문자 수박 (출처 : 경향DB)


좋은 가치가 절대 가치로 변하는 순간 더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 없게 됩니다. 나아가 ‘행복하세요’라든가 ‘건강하세요’라는 우리들의 인사말을 단번에 전근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고집스럽게도 ‘마음이 부자라야 진짜 부자다’라며 저항했던 세력들은 촌스럽다는 이유로 극좌의 취급을 받으며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큰 싸움에서 생각보다 쉽게 이긴 사람들은 그래서 더욱 대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식량과 농업의 위기에 대한 진실보다는 10만 전업농 육성과 1억 농부 만들기 카드를 살랑살랑 흔들며 “부자되세요”, 한 발자국만 헛디뎌도 사달이 날 철탑 위의 노동자들에게도 “그럼, 부자되지 그러세요”, 심지어 자연에도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자되세요. 우리는 강남 땅에는 핵시설과 해군기지를 짓지 않습니다.”


IMF를 넘어서며 국민들은 금반지를 모아 주었지만,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하기 위한 근거들을 차곡차곡 모아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준비한 기간만큼, 협동하고 연대해서 만들어내는 행복한 저항과 행복한 공동체들의 사례를 차곡차곡 모아내지 않는다면 ‘부자되세요’를 이겨먹을 만한 덕담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농업 무시하는 이명박 정부 반대한다’의 문법을 넘어서는 ‘그 한마디’를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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