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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 소설가


몇 해 전 ‘한·러 문학의 밤’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에 갔다가 모스크바 남쪽 멜리호보에 있는 ‘체호프 기념관’을 찾았다.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로 일컬어지는 안톤 체호프가 대표작 <갈매기>를 집필하며 뜨거운 한 시절을 살았던 장소임에도, 그곳은 초라하리만큼 소박한 공간이었다. 작가들의 기념관은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하려 해도 딱히 채울 게 없다. 낡은 책상, 닳은 펜, 손때 묻은 책이 고작인 유품들은 영혼의 부(富)와 대비되는 일상의 빈곤과 고독을 전시한다. 체호프 기념관 역시 작가이면서 의사였던 삶을 증명하는 주사기와 진찰도구 몇 점을 제외하면 별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때 맞닥뜨렸던 쓸쓸한 풍경은 기지와 통찰이 번득이는 그의 작품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해주었다.


체호프의 유머는 독하다. 그는 아이가 태어나면 여물지 않은 귀에다 대고 “글 쓰지 마라. 글 쓰지 마라. 작가가 되면 안돼!”라고 속삭이기부터 하라고 권한다. 그럼에도 아이가 작가적 성향을 드러낸다면 손을 번쩍 들고 외친다. “망했다!” 이유인즉슨 작가가 되려는 열망이야말로 불치병이므로. 이쯤 되면 유머가 아니라 저주인 것도 같다. 문제는 이것을 부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은 집을 사지도 못하고, 1등 칸을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룰렛 도박도 하지 않고, 철갑상어 수프도 먹지 못한다. 그들은 간신히 배를 채울 수 있을까 말까한 음식을 먹고, 가구가 딸린 방을 빌려서 살고, 교통수단은 자기 발로 걸어다니는 것이다”라는 체호프의 독설이 고스란한 현실이니까.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출처; 경향DB)



하지만 ‘그래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작가라는 이름으로 사는 존재들은 지독한 연애 지상주의자이다. 문학으로 앓는 불치병은 황진이네 이웃 총각을 죽음에 이르게 한 상사병만큼이나 치명적이다. 가문의 원수와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막을수록 더 하고 싶어 광란한다. 작가들은 굳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번연한 불행까지 기꺼워할 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절규다. 울부짖음이다. 재채기다. 터져 나오는 그것을 막을 수 없고, 결코 막아서도 안된다.


그런데 작가답게, 작가적인 본능과 욕망과 존재 자체에 충실했던 작가들이 ‘고발’당했다고 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권교체를 바라는 젊은 시인·소설가 137인’의 명의로 경향신문에 게재한 광고가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는 명목으로 광고 게재의 실무를 맡은 소설가 손홍규가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인들을 고발한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가 문제 삼은 내용은 선언문에 실린 ‘독재자’라는 표현과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 답은 정권교대가 아닌 정권교체’라는 표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작가들은 대답했다. ‘정권교체’라는 표현은 여야 후보 모두가 사용한 일종의 시대의식으로서, 여당후보는 ‘정권교체’를 넘어 ‘시대교체’를 강조하기까지 했다고. 선관위가 조치했다는 ‘고발 3건, 경고 7건’의 실체적 내용을 확인하고 형평성을 따져보지 않은 상태에서 신속하게 이루어진 작가들에 대한 고발에 대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법 위의 특권’이 아니라 다만 ‘법 앞의 평등’이라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137인’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밝힌 137인의 작가들을 확고부동하게 지지한다. 그것은 팔이 안으로 굽는 생물학적 이치를 떠나 작가라는 존재와 문학예술에 대한 옹호다. 작가는 애초에 스스로를 불신하고 시대와 불화하는 존재다. 아무러한 공(公)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가장 사(私)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문학은 자유와 그에 대한 열망 없이는 발화하지 못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작가들의 발언에 대한 선관위의 고발을 단순히 위법에 대한 기소로만 볼 수가 없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들려온 소식에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나 재갈을 물리려 다가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과연 나만의 터무니없는 상상일까?


작가들을 말하게 하라. 함부로 떠들고 지껄이고 외치게 하라.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천부인권이요 본연의 임무다. 쥐를 쥐라 못하고 닭을 닭이라 못하고 개를 개라 못한다면, 어찌 꽃을 꽃이라 하고 별을 별이라 하고 바람을 바람이라 할 수 있을까? 꽃과 별과 바람이 사라진 세상에서 무엇이 꽃피고 무엇이 빛나고 어떻게 숨 쉴 수 있을까? 시 한 줄, 소설 한 편 읽지 않고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천하디 천한 세상에서도, 시인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로 꽃핀다. 소설가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로 빛난다.


부디 작가들을 ‘고발’한 이들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언지 깨닫기 바란다. 그들은 다만 터무니없이 여리고 실로 힘없는 작가들을 윽박는 게 아니다. 각각이 눈부신 세계들을 압살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사라진, 입 없는 작가들의 나라는 오직 암흑뿐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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