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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나는 기억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 기억이 죄다 휘발되기 전에, 글씨를 쓴다. 이 모든 비속하고 정답고 지겨운 것들을, 하찮고 애절하고 시시하고 또 시시해서 끝도 없이 사랑스럽고 그리운 것들을.”


서른을 갓 넘긴 글쟁이 김현진은 <뜨겁게 안녕>이라는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도시에서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그렇듯, 고단하고 막막하다고 전했다. 도시에서 넓고 깨끗하게 구획되는 거리는 좁다랗고 아무렇지도 않고 후줄근하고 또 정다운 골목을 쾌속으로 말살하고, 그 골목에서 마주치던 수많은 사람들을 감쪽같이 증발시켰다고 말한다.


김현진은 그 사라져버릴 골목 갈피마다 품고 있었을 사람과 사연을 기억하고 싶어 했다. “사랑하고 증오하고 끝내 미워하면서도 또 사랑했던 도시, 성장촉진제를 맞은 것처럼 광포하게 확장되어 결국 구차한 주머니를 가진 사람은 온몸을 부르르 흔들어 곡식 낟알을 까부르듯 떨구어내고야 말 이 도시에서 나는 끝내 밀려나고야 말 것”을 예감하면서 글을 적어 내려갔다.


시대와 환경은 전혀 다르지만, 백석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백석은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고 적었다. 이때 습내 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서 백석은 생각에 생각을 더듬어 이윽고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는다”고 전했다. 외로운 생각이 들면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했다.


경향신문DB

최근에 글을 쓴다는 것이 뭐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김지하 때문이다. 그를 생각하면 학창시절 문학소년이던 때, ‘김지하 문학의 밤’에 갔다가 대학생만 가득한 강당에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들으며 무서웠던 기억이 새롭다. 대학생이 되면서 <사상계>와 <창조>를 사서 김지하의 ‘오적’과 ‘비어’를 읽고 흥분했다. 숨겨놓은 연인처럼 ‘김지하’를 탐독하는 동안 문체도 김지하를 닮아갔다.


김지하는 내게 김현진이고 백석이었다. 김수영이고 황지우였다. <남녘땅 뱃노래> <밥> <동학기행>에서 만난 김지하도 아름다운 사상이었지만, 시집 <애린>에 새겨진 시어는 더욱 눈부셨다. “단 한 번 울고 가/ 자취없는 새/ 그리도 가슴 설렐 줄이야/ 단 한 순간 빛났다 사라져가는 아침빛이며/ 눈부신 그 이슬/ 그리도 가슴 벅찰 줄이야/ 한때/ 내 너를 단 하루뿐/ 단 한 시간뿐/ 진실되이 사랑하지 않았건만/ 이리도 긴 세월/ 내 마음 길 양식으로 남을 줄이야/ 애린/ 두 눈도 두 손 다 잘리고/ 이젠 두 발 모두 잘려 없는 쓰레기/ 이 쓰레기에서 돋는 것/ 분홍빛 새 살로 무심결 돋아오는/ 애린/ 애린/ 애린아.”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내가 2010년에 쓴 책의 제목이다. 김지하는 애린을 향한 그의 갈망을 어느 순간 접었다. 김지하는 지난 1월8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한때 가톨릭”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는 한때 나의 우상이었다고 적어도 좋을까. 시의 혁명의 통일을 노래했던 김지하의 추종자였던 나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김지하의 조선일보 기고가 나오면서 마음이 다치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향기로운 물, ‘지하’(芝河)가 아니라 지하(地下)에서 외로움에 떨며, 누구든 자신을 인정해 줄 사람을 구걸하는 자의 모습이다. 


언젠가 판화가 이철수를 만났을 때, 그는 “고준한 담론을 설파하는 위대한 사상가라도 되짚어보면 그의 마음은 깊은 강물이 아니라 얕은 도랑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상의 자잘한 욕구와 외로움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는 언제든 자신의 사상을 스스로 반역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김현진은 김지하보다 이제 더 큰 울림이 된다. 그는 강압적인 학교교육에 반발해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와 <네 멋대로 해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뜨겁게 안녕>이라는 책에서 소개하듯이, 그는 “집도 절도 없이 빽도 없이 도시빈민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왔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긍지를 지니고 있다. 김현진은 이 책의 인세의 절반을 이웃과 나누고 싶다며 용산참사 유족들, 유기동물친구들, 쌍용차 해고자, 청년유니온 등을 열거하고 있다. ‘없는 가운데 나누려는’ 그 마음이 고맙고, 그의 발랄한 기상이 구체적이어서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목적을 “수많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신에게 닿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스럽다. “대단히 아름다운 문장이나 세상에 보탬이 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하찮고 정다운 것들에만 정이 가고 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속 좁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당신 덕분이었다”니, 그런 겸손함이 그를 지상에서 구원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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