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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영어를 정식으로 배운 건 중학생 때부터이다. 겨우 알파벳만 떠듬거리며 첫시간을 맞았는데 미리 공부를 해온 친구들이 있었다. 고작 에그(egg), 스쿨(school), 애플(apple)을 발음하는 정도였지만 나는 주눅이 팍 들었다. 철조망 같은 줄이 그어진 펜먼십 노트에 철자 연습부터 시작했다. 영어를 잘해야 성공한다는 압력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는 영어와는 그다지 친하지 못했고, 따라서 잘하지도 못했다. 지금도 영어에 능통한 이를 보면 부럽다는 감정보다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럭저럭 대학을 졸업하고 한 줄의 글이라도 끼적거리게 되었을 때 우리말을 제대로 쓰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통렬히 느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빈약한 어휘는 금방 밑천이 바닥났다. 하는 수 없이 먼지 묻은 국어사전을 꺼냈다. 문득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국어사전은 제대로 들춘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어사전은 손때를 많이 묻혔는데 정작 국어사전은 소홀히 대했다는 진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만회라도 하듯 국어사전을 한동안 끼고 살았다. 작은 사전은 좋은 장난감이기도 했다. 특히 순우리말을 찾는 재미가 새록새록 생겨났다. 가령 발밤발밤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가는 곳을 정하지 않고 발길이 가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 모양. 뜻을 새기며 입에 넣고 웅얼거리면 단침이 고였다. 환한 달밤이면 일부러 발밤발밤 거닐고 싶어졌다.


제대로 한번 공부해 보자, 작정하고 기역의 ‘가’부터 국어사전을 훑어나갔다. 순우리말은 따로 골라서 공책에 옮겨 적었다. 히읗의 ‘힝’까지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읍쯤에서 중단했다. 아뿔싸, 웬 여인한테 그만 눈이 삔 것이다. 그때 그 사전 그 공책, 지금은 모두 없다. 여인만 남았다. 하지만 이런 글이라도 끙끙거리며 쓸 때 맞춤한 단어들이 툭툭 튀어나와 주는 건 그 시절에 국어사전과 뒹군 덕분일 것이다. 


우연찮게 알게 된 영어 단어가 있다. four-letter word. 겉으로 드러나는 뜻은 ‘4글자 말’이지만 속으로는 욕 또는 육두문자라는 의미다. 어에서 천하고 상스러운 단어들이 대부분 4글자로 이루어져서 그런 뜻을 가졌다고 한다. 


좀 고약한 말들의 꾸러미를 그렇게 글자 수라는 공통점으로 묶어 표현한 숙어를 보니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우리말의 어휘에 대한 이런저런 궁금한 생각이 일어났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을 분석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3권으로 된 이 방대한 사전의 주표제어는 44만594개이다. 웬만한 우리말은 다 들어있는 셈이다. 이 중 명사는 33만5057개(65%), 동사는 6만8394개(13%)이다. 그리고 2음절의 단어는 14만1675개, 3음절은 12만1368개, 4음절은 10만2895개로 이들이 전체 단어의 83%나 되었다. 


최근 거리를 걷다보면 기존의 간판을 제외하고도 갑자기 읽을거리가 많이 생겨났다. 그것은 담벼락에도 붙어 있고 현수막으로도 나부끼고 있다. 큰일을 하겠다고 나선 이들의 주장이 담겨 있는 글들이다. 아마도 그 83%는 틀림없이 2개, 3개, 4개의 음절로 된 단어들 중에서 골라 조립한 문장일 것이다.



서희환(1934~1995), '훈민정음서', 1988년, 개인 소장. (경향신문DB)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중요한 특징은 언어능력이다. 물론 언어는 고도로 발달한 뇌의 구조와 기능이 있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그와 함께 구강과 후두(, 설골이 진화해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강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이 인체 부위에 닿아있는 단어는 거의 한 글자로 된 어휘들이다. 보라. 직접적인 것은 입, 이, 혀. 그곳을 들락날락거리는 것은 침, 밥, 물, 술, 숨 그리고 말.


앞에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말에서 한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는 6421개이다. 당장 몇 개를 읊어본다. 해, 달, 별, 산, 강, 일, 총, 균, 쇠, 불, 돈, 길, 글, 책, 너, 나.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한 음절의 글자들은 모두 강한 힘을 비축하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어휘 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들을 죄 동원해 한 문장씩만 만들어도 오늘치 경향신문의 지면을 도배하고도 남을 것이다. 


재미있는 농담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살까말까의 경우, 말다가 정답이란다. 갈까말까의 경우엔 간다가 정답이란다. 이는 경험칙으로도 맞는 말인 것 같다. 전자가 명사를 구한다면 후자는 동사를 부린다. 명사가 많은 곳은 고여 있는 사회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명사가 동사보다 5배나 많다. 동사를 많이 사용해야 살아 있는 사회일 것이다.


한 글자의 단어를 5개 더 사용하면서 이 칼럼을 마무리하자. 우리는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산다. 혼자 꾸는 꿈도 있지만 함께 꾸는 꿈도 있다. 살맛나는 세상은 우리가 움직이면 그만큼 더 빨리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혹 투표장에 갈까말까 망설임의 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땐 동사를 선택하자. 가자. 그리고 손으로 꾸욱 ‘한 표!’를 찍으면서 우리 각자는 힘이 대단히 세다는 것을 증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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