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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글씨 가운데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라는 말이 있다. “작은 창으로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하네”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시던 어린 시절, 일찍 학교를 파해 집에 돌아와 컴컴한 빈방에 들어가 누워 있자면, 그 방의 유일한 쪽창에서 마치 영사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기둥처럼 햇빛이 밀려 들어왔다. 햇빛의 많고 적음은 창의 크기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그때 이미 알아차렸다.


요즘 가장 대표적인 주거시설인 아파트 베란다는 전면 통창이지만, 창이라 할 수 없어서 어둠을 비추는 빛을 느낄 수 없다. 어둠이 자욱해야 빛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 어렸을 적 한겨울에 아이들과 구슬치기를 할 때,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언 손을 바지춤에 넣곤 했다. 그 따뜻함이란! 내 체온이 36.5도라는 사실을 이때만큼 절실한 고마움으로 느끼는 시간은 없다. 내 몸이 내 손을 덥히고 있다는 사실을 추운 겨울에야 느꼈다. 처음 결혼해서 반지하 셋방에 신혼살림을 풀고, 현관의 비가리개에 걸려 장롱이 집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 아내가 처음 눈물을 보였지만,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 된다. 추억이 많은 사람은 삶이 다채로워 같은 시간을 살았어도 더 많이 산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부평의 영구임대주택에 살다가 서울 상계동 불암산 자락 산동네에 자리잡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집들이하는 날, 어머니는 마을버스도 다니지 않는 산동네 언덕바지를 오르면서 표정이 없었다. 내가 “엄마, 여기 공기 좋지?” 하자, 대뜸 이렇게 말씀을 던지셨다. “공기 먹고 사냐?” 어머니는 식구 가운데 가장 번듯한 대학을 나오고도 노동운동한다고 속썩이고, 결혼해서도 ‘이 따위’ 후질한 산동네 집에 방을 들인 자식이 언짢았을 게다. 대학원에서 신학 공부한다고 그마저도 접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담뱃값이 궁하면 장롱 바닥을 자로 훑어가며 동전을 모았던 시절, 당시에도 흔치 않던 쌀가게에서 봉지쌀을 사먹던 시절이다. 그래도 ‘추억’은 아름다운데 어쩌랴.


내 살아온 날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1987년 민주화운동이 있은 연후에 문익환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대학로에서 그분 영결식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그날 눈이 많이 내렸다.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하며 목청을 돋우어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시던 문익환 목사, 그분은 우리 시대에 ‘축복’ 같은 분이셨다. 나라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축복’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누이들은 아파트에 신문이 오면 제일 먼저 신문 갈피에 낀 전단지를 읽었다. 할인행사와 쇼핑찬스를 광고하는 전단지에서 정성껏 쿠폰을 오리고, 엇비슷한 이웃 아주머니들에게 전화를 걸어 쇼핑일정을 잡곤 했다. 싼값에 웬만한 살림을 마련할 줄 아는 주부의 지혜가 그 집 살림을 안정케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나는 정작 기사는 읽지 않고 딴청 부리는 누이들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이젠 그것마저도 내 추억의 ‘2부’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누이들은 사회적 관심은 아니더라도 손이 닿는 한 어려운 이웃을 도울 줄 알았다.


얼마 전 한밤중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충격처럼 다가온 사람이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로 출연했던 오드리 헵번이다. 프로그램이 <세기의 여성들>이었던가. 여기서 헵번이 영화배우의 삶을 접고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취임하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지난 40년은 제가 이 자리에 앉기 위한 리허설이었다.” 헵번은 <사브리나>, <마이 페어 레이디>,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을 통해 영화배우로서 명성을 쌓은 것조차 전쟁 피해아동의 구호와 저개발국 아동의 복지를 위해, 그 아이들의 슬픈 현실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기 위한 ‘리허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순정하게 큰 그녀의 눈망울은 영화 관객을 위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결국 그처럼 큰 눈에 굶주린 눈물이 그렁그렁한 세상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굶주리고 백일해를 앓아야 했던 그녀가 자기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을 잊지 않은 탓이다. 물론 다른 선택도 가능했겠지만, 스타덤을 누리는 것으로 충분했겠지만, 헵번은 그들을 또 다른 ‘나’라고, 인생을 걸 만한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말한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지금 나도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일까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 (경향DB)


내 인생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어떻게 쓸지는 우리의 자유다. 괴테의 말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고, 날씬해지고 싶으면 네 음식을 배고픈 이들과 나누라고 권할 줄 알았던 헵번, 내 고통을 우리들의 고통으로 치환할 줄 알았던 그녀가 보고 싶다. 영화라도 다시 봐야겠다. 추억이 리허설이 되어 내 영혼을 귀하게 이끌어주면 좋겠다.



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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