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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에게 기초연금 월 20만원’‘쌀 직불금 100만원 인상’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은 지난 대선에서 농촌지역의 많은 어르신들을 설레게 했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엷은 미소는 마을이 들썩들썩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를 자극했고 잘빠진 빨간색 디자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데, 더군다나 꼭 꼬집어 쌀 직불금 100만원이라니! 제아무리 홍보의 신이라고 해도 현수막 하나에 이런 기막힌 조화를 담아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쌀값 보전을 위해 농민들에게 지급되는 쌀 고정직불금을 현행 1㏊(1만㎡)당 7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인상해 주겠다는 공약의 예술적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년째 17만원으로 고정되어 있는 쌀 목표가격은 물가상승률과 생산비 인상 등을 반영하여 현실화하고, 고정직불금을 1㏊에 140만원으로 하자는 것이 농민들의 오래된 주장이다 보니 대선 공약으로 100만원 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커다란 선심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농민의 주장과 내일모레 대통령이 될 사람의 이야기는 그 무게가 하늘과 땅 차이라 ‘적어도 올해는 100만원으로 인상되겠구나’ 하는 것은 한글을 알 만한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쓰는 김에 좀 더 쓰지!”와 ‘100만원이 어디야. 5년 동안 한 푼 안 올린 놈도 있는데’ 하는 심정이 잠시 교차했을 뿐, 어쨌든 누가 말했든 반가운 일이었고, 빨간색 현수막 담당자, 홍보의 신은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할 줄 당연히 예상했을 것입니다.


쌀 직불금은 쌀 소득 보전 정책의 일부입니다. 바로 체감할 수 있는 액수가 제시되는 만큼 민감하고 농민들의 관심이 높습니다. 몇 해 전 고위 공직자를 비롯해 몰지각한 지주들이 농민들의 쌀 직불금을 가로챈 사실이 뉴스에 크게 보도되기도 하였습니다. 쌀 소득 보전 정책에서 사실 더 중요한 것은 3년마다 정하기로 되어 있는 쌀 목표가격의 내용입니다. 현행 제도에서 쌀 직불금은 이때 정해진 목표가격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2005년도에 도입된 쌀 목표가격은 쌀값의 급격한 하락을 막고 적정한 수준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한 취지로 시작됐지만, 물가가 오르건 말건, 땅값이 오르건 말건, 비료값, 종자값이 오르건 말건 80㎏에 ‘나는 원래부터 17만원이다’ 하면서 오히려 산지 쌀값을 묶어두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벼농사가 농가소득의 절반이 넘는 농민들로서는 무척 서운한 일이었습니다. 한 끼 쌀값이 껌값보다 못한 지경이고 도시가구 대비 농가소득 비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데도 쌀값은 왜 오르면 안되는 겁니까?


제목 쌀직불금 규탄 (경향DB)


며칠 전 정부는 쌀 목표가격을 17만4000원으로, 4000원 인상하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쌀 전업농이나 농민회 등에서 80㎏ 1가마에 23만원의 목표가격을 주장하고 있고 국회의원 일부가 이미 21만원의 목표가격을 내용으로 하는 ‘쌀 소득 등의 보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해 놓은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정부와 농민의 인식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매년 올라가는 물가상승률과 생산비 증가라는 공통된 상황인식에서 어떻게 쌀 목표가격이 여전히 10년 전 수준이 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약 올리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언론이든 정부든 ‘8년 만에 목표가격 처음으로 인상’이라는 표현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쌀 직불금 100만원 인상’도 실제로는 80만원으로 고시했습니다. 궁색한 대로 100만원은 2017년까지 단계적인 이야기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 140만원을 주장해 온 농민들에게 100만원은 올해 이야기지 2017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달 용돈 1만원을 받는 큰딸에게 2017년 용돈도 1만원일 거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선 공약이 “빌 공자 공약이더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박근혜 정부의 농업 정책은 이미 쳐다볼 것도 없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쌀 직불금 단돈 20만원의 차이가 행복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인들, 즉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선각자와 ‘원래 잘 잊어먹잖아’ 하는 도인과 ‘누가 한다고 달라지겠느냐’와 ‘아무 상관 없으니 될 대로 돼라’들의 실망도 만만치 않습니다.


쌀값은 농민값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논 농업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논 농업은 농업의 심장과도 같은 것이고 쌀과 관련한 정책은 정부가 농업을 대하는 자세와 성의가 어떠한지를 재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쌀 소득 보전 정책의 분명한 의지 없이는 정부가 주장하는 ‘강소농’이나 ‘농업의 6차 산업화’ 같은 것들도 실은 ‘농사 지어서 돈 벌기 어려우니 일을 좀 더 많이 하시죠’ 하는 메시지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농업에 투자하고 농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정확히 후세에 있습니다. 나와 동네 아저씨들의 빈 주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다음에 농사지을 누군가를 위해서 20만원은 올해 꼭 돌려받고 싶습니다.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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