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갑수 | 도서출판 궁리 대표


“한때 나를 뻑가게 만든 카수의 공연. 시간된다면 표 6장 끊으마.” 친구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마침 올해의 꽃산행도 거의 파장 무렵이라 주말이 좀 한가해졌다. 공연소식을 뒤졌더니 노래는 알 법했지만 낯선 가수였다. 내가 둔한 놈이었다. 내가 미처 이름을 몰랐을 뿐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번 공연도 가수의 팬카페에서 힘을 모아 여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노래를 들어보면 아, 그 노래가 그 가수야! 하고 알아차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11월 셋째 토요일,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 가수는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노래를 불렀다. 우울한 1980년대를 통과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노래들이었다. 주로 기타를 이용한 반주였지만 웅장하고 활달한 느낌이었다. 총 3부로 이루어진 공연이 끝날 무렵이었다. 


 “벌써 마지막 노래군요. 제목은 ‘강매’인데, 물건이나 표를 억지로 파는 것을 강매라고도 하지만, 실은 강가에서 보아주는 이 아무 없어도 혼자 쓸쓸히 피어난 매화입니다.” 가수의 눈가가 물기로 어룽지는 듯했다.


가수의 이름을 밝히자. 윤선애. 1984년 대학 노래패 ‘메아리’에서 노래 활동 시작. 노래 모임 ‘새벽’에서 활동하며 ‘그날이 오면’ ‘저 평등의 땅에’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등의 노래를 불렀다. 2005년 첫 싱글 앨범 <하산> 이후로 2009년 두 번째 음반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표했다. 이 외 디지털 싱글 음반에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살아가는 것이 더 큰 용기죠’가 실려 있다. (공연 팸플릿 중에서)


[김석종의 만인보]다시 무대 서는 ‘80년대의 전위’ 윤선애 (출처;경향DB)


공연도 좋았고, 가수도 좋았고, 노래도 좋았다. 특히 강매(江梅)를 소개하는 말은 오래된 추억 하나를 댕기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사실, 이런 공연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지난 시절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자면 결국 그때 그 시절의 ‘나’가 돌연 나타나서 일상에 찌든 나를 빤히 쳐다본다. 과연 그때 너는 뭘 했지? 캄캄한 객석에 앉아 소심함, 부끄러움, 한심함, 비겁함 등등의 복잡한 심사를 차례로 만나야 한다. 어려운 시대의 일부를 감당했던 노래의 곡조와 가사가 절실할수록 마음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가수는 몸이 곧 악기일 텐데, 어쩌면 저 나이가 되도록 목소리 색깔이 이리 신선할까. 초대해준 친구는 흥건해진 감동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다. CD를 사고 가수의 사인도 받았다. “… 너를 찾아 헤매다 나의 외로움만 쌓이고 쓰러진 꽃잎을 찾으려고 등 뒤 해지는 줄 몰랐네.” 강매의 한 소절을 흥얼거리면서 공연장을 나섰다.


복사꽃 흐벅진 때라면 ‘봄날은 간다’를 부르겠다. 맞춤하게 비라도 와 준다면 ‘봄비’를 읊겠다. 그러나 지금은 혹독한 겨울. 며칠 전 눈이 전격적으로 왔다. 사람들의 발길은 눈을 더럽히지만 나무들은 눈을 떠받들고 있다. 경복궁역에서 사무실로 오는 골목. 인왕산에서 굴러온 것인가. 한 줌의 낙엽들이 발길을 붙들었다. 꽃잎이나 낙엽은 흙으로 녹아들면 양분 덩어리다. 그러나 세상구경 나섰다가 길을 잘못 들어 방황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어서 이 거리를 벗어나야겠다는 듯 하수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찬바람에 쫓기는 초라한 낙엽을 보자 흥얼거리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 ‘보고 싶은 얼굴’. “… 거리마다 물결이 거리마다 발길이 휩쓸고 지나간 허황한 거리를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이 노래가 발표된 것은 1964년이다. 책의 제목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느 문학평론집에서 읽은 적이 있다. 간절했던 혁명이 느닷없는 군홧발에 짓밟힌 뒤 많은 이들이 술잔을 앞에 놓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가사와 곡조를 웅얼거리면 그 시절을 통과해낸 이들의 울분과 울적한 심정이 그대로 전해오는 것 같다. 허망한 심사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작사가와 작곡가가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그 시대가 그 노래를 만들고 가꿔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각자 처한 자리에서 울퉁불퉁한 시절을 견디면서 우리는 살아왔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이고, 또 그 어디로 건너가고 있는 중이다. 그 길목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계절이다. 2012년 12월19일 오후 5시59분30초. 아마 올해도 텔레비전에서는 그 시각이 되면 카운트다운을 할 것이다. 그리고 6시 정각이 되면 한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것이다. 그는 우리들 각자가 내심 간절히 원했던 ‘보고 싶은 얼굴’일까. 


지금 주위는 선거 열기로 뜨겁다. 골목을 메우는 요란한 선거구호와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운동원의 발길들. 그들의 눈에는 낙엽조차 모두 표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이것은 실제로 나무가 행사한 고귀한 표이기도 하겠다. 나무들은 이를 통해 산을, 저들의 세상을 바꾸었다. 그래서 스산한 가을을 갈아치우고 정신이 번쩍 나는 겨울을 맞이하는 것이렷다. 겨울을 끙끙 앓으며 새 세상을 준비하는 나무들처럼 부디 우리 사는 세상도 그렇게 바꿀 수 있기를!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