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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 서천군 농민회 교육부장 sinpo9085@hanmail.net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을 더 좋아하는 것은 꼭 게을러서만은 아닙니다. 뭐라고 딱 정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빈 들판 앞에 선다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걱정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물음에 맞서는 것입니다. ‘이삭거름을 얼마 더 줄까’가 아니라 ‘올 한 해 얼마를 벌었나’에 답해야 하는 것이고, ‘삽질 해서 뭐하나’보다는 ‘농사 지어 뭐하나’에 답해야 하는 것이며, ‘농협 빚은 다 갚았나’가 아니라 ‘10년 후에 어떻게 살 거냐’는 물음에 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물음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더욱 실존적인 물음이기도 합니다.
너른 들판을 보며 민주대연합을 이야기한 어떤 시인의 상상력도 그럴듯하지만, 와서 보면, 눈으로 보이는 겨울 들판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자극합니다. 더구나 논두렁까지 폭 파묻히게 눈이 와서 내 논, 네 논 분간이 가지 않는 날이면 우리 동네에서는 아이들까지도 국민대통합 정도는 우습게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겨울밤은 국민을 일일이 실로 엮어 봉합하고도 남을 만큼 길기도 한데, 나는 이 좋은 들판 앞에 서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직업적 자긍심에 맞는 좀 더 심오한 생각과 들판을 막힘없이 흐르는 바람과 가창오리떼처럼 스마트한 삶을 꿈꾸는 것입니다. 겨울 긴 밤 아무도 없는 동안 난 절대 딴짓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년 봄 즈음에는 주변에 내놓을 작은 선언 정도로 갈무리하기로 작정합니다.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황금들판 (출처 :경향DB)
역시, 밤이 길기 때문이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이지만 묵은 일기장을 들춰본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제법, 어쭈, 어허 할 정도의 기특한 생각들도 있고 제기랄, 젠장, 에휴 할 만한 한심한 나도 있습니다. 운 좋게도 아직 버려지지 않은 편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때 네가 한 네 말을 기억한다’고 서늘한 눈빛으로 말합니다. 불안한 청춘에 대한 어머님의 당부는 한글 프로그램에 ‘눈물체’라고 등록해도 좋을, 글씨만 봐도 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알게 하는 마술이 있습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은 연애시절 편지에는 ‘동지적 사랑’ 같은 비문과 ‘영원한 사랑’ 같은 비현실이 차고 넘쳐 소각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떼어 내어 잔소리와 투정과 투쟁의 일상에서 적절한 부적으로 재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백무산의 ‘강령’이라는 시입니다. ‘성실, 노력, 정직은 네 청춘의 강령이었을까/ …/ 유치하도록 진실한 사내/ 아직도 그 강령 폐기하지 않았노라고/ 주먹을 흔들어 보이는 사내/ 운동도 조금씩 꼬여버린 세상, 그래/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싸우자/ 우리의 강령이 틀림없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필사하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한참 몸 둘 바를 몰랐지만 그런 유치함, 미숙함, 투박함이 아직도 ‘성실, 노력, 정직’의 강령을 폐기하지 않은 힘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하고 지난 시절의 내가 말을 건네니 곧 부끄러워집니다. 비교적 정확한 지도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나 오래된 지도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이제는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볼 친구도, 눈물체의 당부를 주시는 어머님도 다들 적당한 거리에 있습니다.
식상한 반성문이 될지, 감동 없는 출사표가 될지 아직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아직 겨울밤은 많이 남아 있고, 또 생각이 영 잡다해지면 겨울밤이 길기 때문이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일 터입니다만, 2013 선언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살겠다는 막연한 고민보다는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함께하고 있을지 적어 보겠습니다. ‘성실, 노력, 정직’의 강령은 이제 그만 전문에 담아내고 꼼꼼하고 구체적인 강령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맺고 끊는 결기도 가져 보겠습니다. 쭉 해왔던 일들 중에 이제는 그만해야 하는 일부터 가려내겠습니다. 이참에 크리스마스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소식을 어린 딸들에게 어떤 표정으로 선물과 함께 전해야 하는지도 정리해 보겠습니다. 궁색할 때 말로만 떠들던 히말라야 등반도 시기를 정하고 허풍을 치겠습니다. 생각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그만 내려놓고 할 수 있는 일의 순서를 매겨 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생활의 언어로 적어 보겠습니다. 내 삶과 이 시기에 좀 더 집중한다면, 그리고 죽지 않는다면, 10년 후 나에게도 ‘생각보단 괜찮은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밤에 들판에 선다는 게 춥기도 하고 남사스러운 일이니 눈을 감고 함께 상상해 봐도 괜찮을 것입니다. 넓은 들판이 있고 함박눈이 펄펄 내립니다. 바람은 적당히 불고 가창오리 군무가 하늘을 수놓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익숙한 행진곡풍의 노래를 허밍으로 낮게 시작합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나를 잊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노래가 ‘빰빠 밤빠 밤빠밤’ 하는 대합창의 전주곡이 되는 날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확신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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