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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10회에 걸쳐 1000만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박근혜 하야’를 외쳤습니다.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집회의 주역은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발랄한 상상력과 놀라운 정치의식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촛불집회는 처음부터 청소년이 주도했습니다.

‘청소년들이 만들어온 한국 현대사’를 담은 <우리는 현재다>(공현·전누리, 빨간소금)에 따르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기 위해 열린 “2008년 5월2일과 3일, 첫 촛불집회에 참가한 2만여명 중 60~70%가 중·고등학생으로 추정”되었으니까요.

“대한민국을 건국한 계기인 3·1운동에서부터 숱한 독립운동들,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과정 그리고 교육민주화 운동이나 광장에서의 사회운동까지, 청소년들은 정치적인 시민으로 계속 그 역사의 현장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사건별로 정리한 <우리는 현재다>의 저자들은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공이 아니라 현재의 주인공”이라고 단언합니다.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 운동사>(공현·둠코, 교육공동체벗)에서는 청소년들이 운동을 하는 이유를 “ ‘청소년이라서 그랬다’는 대답밖에는 할 말이 없다”고 말합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야기를 더 들어볼까요. “오히려 반대로 묻고 싶다. 여러분의 청소년기는 어땠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발버둥 칠 법하지 않았느냐고. 어차피 몇 년만 참으면 청소년기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청소년운동을 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 없다. 청소년기의 일시성은 사람들의 인내심에 관련된 문제이지, 청소년들이 겪는 부당한 억압과 차별을 정당화해 주거나 청소년들이 순응해야 할 이유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어차피 나는 지금 여기 살아 있는 것이지 미래의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여기에서 사람답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작년 출판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이들도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제57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교양부문 수상작인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사이행성)의 저자 천주희는 1986년생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학자금 융자로 “청년들을 빈곤으로 몰아넣고 채무자로 만들고 있”는 현실을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이렇습니다.

“대학교육을 개인의 스펙 쌓기와 성취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식 만들기의 장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찾아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왜 대학에 가야 하고, 왜 빚을 져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빚을 지고, 무엇을 빚지며 사는지 물어야 한다.”

그는 “소 팔아서 대학 보내던 시대에서 대출 받아서 대학 가는 시대로의 이행”은 “IMF 금융위기 이후 가족경제의 변화, 신자유주의적 복지체제의 도입, 대학교육의 금융화 과정” 등 세 가지 축의 변화에서 구축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축의 변화는 ‘학자금 대출’ 시장에서 만나고, 부채의 증식이라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채권·채무 관계와 가족 공동체 등의 변화를 초래한 이 변화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고등교육 비용의 원천이 가족부채에서 금융부채로 이행했다는 것 이상으로, 오늘날 이 사회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빚지는 주체’가 되기를 요청하고 거대한 채무자 집단을 양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오늘날 빚지는 대학생은 새로운 사회적 요구이자 새로운 주체의 출현을 예고한다.”

그는 대학교육을 “개인의 ‘투자’에 의한 학력 자본으로 인식”해온 기존의 생각을 바꿔 대학교육의 ‘상품화’를 포기하고 ‘공공화’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가 말하는 ‘공공화’란 “대학 교육비용을 사적 영역이 아닌 국가나 공적 영역에서 부담하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는 “사교육비 17조원, 학자금 대출 12조원이나 드는 나라에서 대학무상교육은 불가능한 일이 전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아무런 대안도 없이 ‘일자리 창출’만을 공언(空言)해온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이제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작년 말에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는 상처만 주는 대화에 지쳐버린 여성들을 위한 “성차별 토픽 일상회화 실전 대응 매뉴얼”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이민경이 이어서 출간한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이상 봄알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역사상 여아 낙태가 가장 심했던 1990~1994년 무렵에 태어났습니다. 1994년에 태어난 셋째 아이의 남녀성비는 190.6이었습니다.

그가 이 책들을 쓰게 된 것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때문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한국에서 여성 살해가 최고치에 다다랐을 때 태어난 나는 강남역 살인 사건이 발생한 2016년 5월17일에야 이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많은 이가 의아해하듯 유사한 사건이 여태까지 숱하게 있었고 그때마다 피해자가 피해를 당한 데에 여성이라는 이유밖에 없었음은 이미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이 내 생각보다 더 가까이에 있음을 피부로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중략) 여성이 태아일 때부터 겪는 이 선택적인 죽음의 실체가 또렷이 드러났다. 박탈감이 밀려왔다. 이것은 이해이기보다는 직감이었다. 내 또래의 많은 여성이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고 그것을 표현했다.”

천주희와 이민경처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고단한 현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청소년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촛불광장에서도 청소년의 상상력은 넘쳐났습니다. 그들이 있기에 정유년 새해에도 밝은 희망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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