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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고요하다. 추수하느라 분주한 농촌들녘 풍경들도 액자 속 그림 같다. 농부들의 움직임은 하나의 무언극이 된다. 가을 햇살도 소리 없이 내린다. 누군가에게 방해라도 될세라 살금살금 뒤꿈치 들고 오나보다. 숨을 멈췄는가. 계곡 물조차 소리를 안 낸다. 앞마당 강아지도 아랫배를 드러내 놓고 선정에 들었는지 짖지도 않는다. 그래서 할 말이 없다. 입을 다물게 한다. 뭔가에 귀 기울이게 하는 가을. 참 고요하다.
고요하기만 하랴. 초롱초롱하다. 가을은 한낮이라도 졸리지 않는다. 일을 많이 해도 졸음이 없다. 밤하늘 별처럼 초롱초롱하다. 고요하면서 초롱초롱하기. 가을이다. 고요하되 원숙한 생명감. 가을을 닮으라 한다. 고요하게 외친다. 우리 인간 문명도 가을에 접어들었다고. 성장하고, 벌어들이고, 싸워 이기고, 쌓기보다는 고요해지라고.
가을은 물들게 한다. 발간빛 단풍들이 산꼭대기에서 야금야금 마을로 내려온다. 푸른 초목들이 여름의 기억을 벗고 하나둘 가을빛에 물든다. 감나무도 고욤나무도 단풍잎으로 물든다. 버티고 버티던 들깻잎도 대추나무 잎도 무릎을 꿇고 동참한다.
호미 끝에 이끌려 나오는 고구마도 물들었다. 발간 가을빛. 검고 축축한 땅속에서도 알아챘다. 가을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땅 위의 것들이 수군거리며 붉게 물드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해 가을의 기억을 또렷이 되살려 어김없이 물든다. 가을은 집을 나선다. 여기저기서 손짓하는 문학기행, 음악회, 산악회, 마을축제, 답사기행, 노인의날 행사. 흰 구름 두둥실 저 하늘 먼발치에서 손짓하는 듯해서다. 그래서 집을 나선다.
전자우편 초대장에 물들어 농기구를 놔 버린다. 황망히 집을 나선다. 가을 속으로 들어간다. 참가비 없고 선물까지 준다. 공짜로 차도 태워주고 잠도 재워준다. 그래서 집을 나선다.
면 단위마다 돌아가면서 열리는 노인의날 행사. 집을 나선다. 지루하지만 그렇고 그런 기념사와 축사와 격려사를 들어주고 나면 수건도 하나 준다. 추첨권도 준다. 점심도 준다. 술도 준다. 그래서 집을 나선다. 양복 입은 지역 유지들이 굽실굽실 인사도 한다. 휠체어에 앉아 몸을 못 가누는 우리 어머니에게도 악수를 청하고 음식도 권하다. 그 곁에서 새파랗게 젊은 내가 노인의날 노인전용 음식을 얻어먹는다. 그래서 집을 나선다. 이 가을엔.
가을은 배부르다. 옆동네 아재비 집보다 윗동네 외할아버지 집보다 가을은 산과 들에 먹을 게 많아 배부르다. 도시로 다들 떠나고 홀로 남은 밤나무들. 배나무들. 어서 오라 손짓한다. 주워가지도 않는다. 따 가지도 않는다. 벌레가 먹다가 배 터질까봐 남겨 둔 밤. 인간과 다투지 않고 나눠주는 밤. 토실토실 익어서 저절로 떨어진 이 밤들은 이빨이 안 들어갈 정도로 야물다. 맛은 40년, 50년 전 기억을 되살린다. 못 생겨도 자디잔 배들은 칼로 자를 필요도 없다. 한입 베어 물면 시원하고 달기가 비할 데가 없다.
가을 햇살을 마지막 생명줄인 양 부여잡고 계속해서 꽃을 피우며 풋호박을 맺는 호박넝쿨은 아무리 지져 먹고 전을 부쳐 먹어도 하루 자고 나면 주먹만 한 열매를 또 선사한다. 썰어 말리느라 채반이 모자란다. 마당도 툇마루도 배부르다. 고추, 호박, 가지, 밤, 고구마순, 오가피열매, 옥수수가 가득 널려 배부르다.
가을은 참 예쁘다. 박강수의 노랫말처럼 정말 예쁘다. 마음도 구름처럼 흐른다. ‘조각조각 흰구름이 새하얗게 미소 짓는’ 박강수는 노래한다. 흐르는 것은 다 예쁘다 한다. 어딘가에 매이지 않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흐르는 가을. 사색의 숲길로 흘러드는 가을. 한가로워진 그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을. 참 예쁘다. 악착스레 푸름이 무성하던 여름. 그 여름을 잘 통과해 온 가을이라 더 예쁘다.
전희식 | 농부·‘아름다운 후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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