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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유세로 바쁜 어느 대통령 후보의 아이가 유괴당한다. 대통령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아이를 찾으라고 명령하고, 경찰과 검찰은 결국 유괴범에게 모진 고문을 가해 아이 숨긴 곳을 알아내 아이를 구한다. 대통령은 수사관들을 일계급 특진으로 포상한다. 이때 어느 한 후보가 유괴범을 고문한 수사관과 이들을 포상한 대통령을 비판하고, 그는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2012년 가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검증하자는 취지로 쓴 녹색세상 칼럼의 골자이다. 며칠 전에 지금 우리 사회가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아 가족들에게 유괴범 고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문민정부 때 태어나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고등학생 딸은 절대 안된다고 말한다. 독재정권 치하에서만 교육받은 아내는 정반대다. 아이를 찾을 수만 있다면 고문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도는 큰 사건이 터졌을 때 나오는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는 것 같다. 미국 사회는 9·11 테러를 당했을 때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거의 전폭적으로 승인했고, 테러 용의자와 잠재적 테러범에 대한 고문을 용인했다. 그래도 자국 영토 안에서 고문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는지 쿠바에 있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이들을 조사하고 고문했다. 부시 퇴장 후 등장한 오바마는 관타나모 수용소를 없애겠다고 약속했지만, 재선되고 2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없애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는 수용소를 공식 폐쇄하지 않고 수감자들을 조금씩 풀어줌으로써 수용소를 해체하는 쪽을 선택한 것 같다.

일본에서는 3·11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 모든 원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시민 대다수의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거꾸로 갔다. 처음에는 없애려는 것 같았지만 재가동으로 굳어져가고 있다. 책임자 처벌도 없었다. 사고는 예측 불가능한 비상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도쿄전력 임직원들은 사고와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했다. 그래도 조사는 철저히 했다. 일본 의회 최초의 독립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검찰과 정부의 지원을 받아 1년 동안 거의 1500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800명에 가까운 관련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방대한 조사보고서를 내놓았다.

2002년 스위스와 독일 접경 상공에서 발생한 러시아발 항공기 충돌사고도 그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사고는 스위스 관제사들의 잘못으로 일어났고, 희생자는 대부분 러시아의 어린 학생들이었다. 관제사들은 스위스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과실치사를 이유로 집행유예 처벌을 받았다. 그러자 희생자 가족 중 부인과 두 아이를 잃은 칼로예프라는 건축가가 스위스로 가서 관제 책임자를 살해했다. 스위스에서 수년의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고향인 러시아 북오세티아 공화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고, 두 달 후에는 건설부 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독일 정부는 몇 달 전 독일 사진기자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아프가니스탄 경찰관의 사형집행에 반대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형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주주의 회복, 국정원 개혁 (출처 : 경향DB)

위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 성숙도 순위를 매긴다면 독일, 미국과 일본, 러시아 정도가 될 것이다. 한국은 어디쯤에 들어갈까? 지금의 우리 사회라면 일본 아래쪽일 것 같다. 사고 규명을 위한 독립조사위원회도 구성 못하고, 가상의 책임자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엄벌하려 하고, 기본권 침해에 대한 우려는 거의 없는 게 현 상황이다. 모두 민주주의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일어나는, 대선 때 후보들의 민주주의 신념에 대한 무검증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다시 민주주의를 무겁게 여기는 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국가개조의 제일원리다.


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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