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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불이 켜졌는데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도 역주행이다. 당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사고는 반드시 나게 돼있다. 차를 세우거나 방향을 돌리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브레이크도 말을 듣지 않고 운전자의 인지 능력도 형편없이 망가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제 피해를 줄이려면 도로를 통제하고 방어벽을 치는 수밖에 없다.

며칠 전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 결과를 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장관들은 산업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 시행은 미루고 탄소 배출권거래제의 감축률과 부담금은 대폭 줄여주기로 했다고 한다. 둘 다 사회적 합의를 뒤집고 법을 어겨가면서 내린 결정이다. 이들의 뜻대로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분명해진 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들이 ‘갑’이고, 관료들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을’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자동차 부문은 올해 1월 정부가 발표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 로드맵에 따라 2020년까지 1780만t을 감축해야 한다. 하지만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가 물 건너가게 되면 이 중 10% 정도는 줄일 방법이 사라지게 된다. 온실가스와 연비 기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맞춰 보완한다지만, 특정 기업의 뒤를 봐주려고 법질서마저 무너뜨리는 정부의 ‘백지 어음’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는 연비 규제보다 훨씬 약한 제도다. 약한 제도는 내팽개치면서 나중에 강한 규제를 펴겠다는 것은, 당장의 비난을 모면하려는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 (출처 : 경향DB)


배출권거래제는 더 심각하다. 이 제도 역시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와 마찬가지로 시행을 2년 연기했었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산업계의 단골 레퍼토리에 정부가 굴복했기 때문이다. 법률에는 수출주력업종과 에너지집약업종은 배출권을 계획기간에 관계없이 100% 공짜 할당한다는 특혜조항까지 포함돼 있다. 행여나 기업들에 무리한 부담이 갈까봐 이중 삼중의 보호 장치를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감축률을 대폭 줄여 향후 3년간 감축 로드맵에 따른 기준보다 5800만t을 더 할당할 계획이라고 한다. 배출권 가격이 1만원이 넘을 경우 정부가 개입해 인위적으로 가격을 낮춘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5800만t은 2017년까지 산업계 전체가 감축하기로 한 양의 48%이고, 가정과 상업 부문 감축량의 80%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다. 배출권 가격이 1만원 선에서 유지되면, 배출권 구입비용이 감축비용보다 더 싸기 때문에 기업들은 감축 부담을 별로 느끼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배출권 퍼주기’가 정부의 자기 부정과 신뢰성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배출권 기준가격 1만원 운운하는 건 말할 가치도 없다. 가격변동이 기본인 제도의 기본 성격조차 이해하지 못한 무지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현행 법률과 제도는 배출권거래제의 도입 취지가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에 있음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배출권거래제 대상 업체들이 내뿜는 양은 국가 배출량의 82%나 된다. 그런 점에서 배출권 할당 실패는 곧 국가 감축목표 달성의 실패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개다. 가정과 상업 부문에 부담을 지우거나, 산업계의 감축부담을 다음 정부로 대폭 떠넘기거나. 어떤 선택을 하든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정부라는 비난은 불가피하다.

오는 23일 박근혜 대통령은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 연설할 예정이다. 대폭 후퇴한 온실가스 감축정책을 들고 갈 생각이라면, 다른 국가 정상들로부터 받게 될 따가운 시선은 감수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브레이크도 없이 역주행하는 자동차에 몸을 실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선택은 순전히 그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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