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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고 보니 시골에서는 추수일로 바쁘다. 쾌청한 요즘 날씨는 하루 햇살이 100만원짜리라는 말도 나오고, 요대로만 가면 벼농사는 대풍이 될 거라는 예측도 한다. 그만큼 가을걷이 때는 한나절 햇살이 수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얘기다.

날씨에 따라 작물별로 희비가 엇갈리는데 벼농사는 대풍이 예상되지만 고추는 여름철 잦은 비로 작황이 별로 안 좋다. 그래서 작년에는 말린 고추 한 근을 4500원이면 살 수 있었지만 올해는 1만2000~1만3000원에 거래된다.

어느 자리에선가 내가 작년에 농약을 전혀 안 쳤지만 고추를 다섯 번 딸 때까지 병이 없었다고 했더니 못 믿기는지 하루 동안에 다섯 번 밭에 나가서 딴 거 아니냐고 농담처럼 묻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밭 고추가 다섯 번 따고도 서리가 내릴 때까지 병이 들지 않고 싱싱할 수 있던 것에는 몇 가지 비밀이 있다. 유난히 고추 키가 작다든가 고추를 지지대에 심하게 묶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잡초가 같이 자란다든가 곁 이랑에 들깨가 심어져 있다는 것도 고추가 병들지 않는 비밀에 속한다. 자연재배 농부들의 고추밭이 다 이렇다고 보면 된다.

시설하우스에서 재배하는 고추는 사람 키만 한 것도 있지만 우리 집 고추는 큰 놈이 한 자 반(45㎝) 정도밖에 안된다. 그렇다고 종자가 난쟁이 고추인 것은 아니다. 그냥 땅의 영양이나 뿌리의 발육 상태에 알맞은 크기가 되다보니 그럴 뿐이다. 한마디로 최대한 자연 상태에 가깝게 고추를 키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 작물은 병이 없다. 들풀이나 들꽃에 병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농부의 노력만으로는 안된다. 과잉 성장을 조장하지 않는 농사. 키가 작고 조그마한 고추, 많이 달리지도 않고 한꺼번에 붉지도 않는 고추. 농부의 신념에 소비자의 취향이 함께해야 가능한 일이다.

지난 겨울 경남 산청군 오부면 중방마을 딸기농장에서 비닐하우스 재배 농민들이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친환경 산청딸기를 수확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올 추석은 40년 만에 가장 이른 추석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제상에 오를 사과나 배, 포도에 비상이 걸렸다. 극조생종이 아닌 이상 9월 중순이 되어야 제대로 익는데 9월 초가 추석이고 보니 대부분의 농가에서 6월부터 성장호르몬과 착색제를 뿌리기 시작했다. 과일의 덩치를 키우고 색깔을 빨갛게 물들이기 위한 농약들이다.

올 추석에 산 사과나 배들은 상온에 오래 보관이 안되고 쉬이 물러버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과도하게 성장하면서 지나치게 비대해진 과육은 정상적으로 자란 과일과 달리 수분함량도 많고 부패도 빨리 진행되고 과일이 맛도 없이 푸석푸석하기 때문이다. 성장촉진제는 옥신계와 지베렐린계 등이 있는데 원래 벼 키다리병 병원균이다. 식물생장조정제라 하여 셀 수도 없이 많은 농약들이 팔리는데 이름마저 속임수가 넘친다. 진상품, 안티폴, 포미나(폼이 나), 쑥쑥, 도레미, 애플빅(큰 사과), 다조아(다 좋아), 더크리(더 커겠다) 등등. 과수 농장에서 애용되고 있는 카바이트 성분인 에틸렌 계열의 농약은 성장제의 특징상 성인의 노화를 촉진하고 아이들의 성 조숙증을 유발한다. 성 조숙증은 어린이의 성장판을 닫아버린다. 더 이상 몸이 자라지 않는 것이다. 농약의 ‘기준치’라는 말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게 현실이다. 기준치대로 농약을 치는 농부는 없다. 하루라도 빨리 수확하여 비싸게 팔겠다는 성급한 마음에 인심 좋게도 농약을 듬뿍듬뿍 더 뿌린다.

경제의 성장주의가 사회적 약자를 자꾸 위축시키고 격리의 대상으로 여기듯이 농산물의 성장촉진 농약제는 못생기고 작고 때깔이 좋지 않은 진짜 농산물을 다 몰아내고 있다. 키가 작고 적게 열린 우리 집 고추가 더 귀한 이유다.


전희식 | 농부 ‘아름다운 후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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