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강원도 평창에서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가 시작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초등학교에서 자연이라는 과목이 왜 사라졌지?” 아이에게 물으니 과학 과목으로 바뀐 게 벌써 오래전이라고 한다. 내용이 달라진 건 별로 없다니까 자연과 과학의 이름만 바꿔치기한 셈이다.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에게 ‘자연’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모르긴 몰라도 암기만 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이었을 것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유기물의 구성 원소인 탄소(C), 수소(H), 산소(O), 질소(N)를 쉽게 외울 수 있는 팁까지 알려준다. “CHON(촌)티를 날려버려라! 어때, 간단하지?”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은 많지만 대표선수는 생태학이다. 인간과 자연을 연결해주는 생태학은 오늘날의 인간관과 세계관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자연과학으로서의 생태학과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빌 메키번은 <자연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는 자연의 종말이 세상의 종말은 아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물론 이전과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이전과는 다른’ 것은 실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인식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뜻한다.

따라서 문제는 자연관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는 생태학에서도 감지된다. 전통적인 생태학의 탐구 대상은 인간의 활동을 배제한 자연이었다. 하지만 자연을 ‘인간의 영향을 완벽하게 받지 않은 순수 그 자체’로 규정하는 순간, 지구에는 자연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현대생태학은 문화와 기술을 포함해 인간의 활동을 자연현상의 일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 도시생태학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도시라는 삭막한 공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일부 생태학자들은 오늘날처럼 자연환경이 파괴되어 있는 조건에서 인간의 간섭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라고 강변한다. 이들의 시각으로 보면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구분은 불가능하며,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자연을 보호하는 길이라는 믿음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들은 자연의 정원화(庭園化)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문화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인간에 의해 변형된 인공 자연도 자연에 포함될 수 있다면, 보호해야 할 자연과 보호하지 않아도 좋을 자연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게다가 하천을 복원한다면서 벌이는 대규모 토목공사, 미생물 농약과 약용 판매를 위한 실험곤충의 대량증식, 수만마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치어 방류, 이건 어떻게 봐야 하나. 이처럼 선의를 가장한 인간의 개입은 자연으로 회귀하기 위한 선택일 수 있지만, 뒤집어보면 자연을 더 확실하게 지배하고 싶은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자연은 그 자체로 자연이다. 인간에 손이 닿지 않는 그 자체로. (출처 : 경향DB)


자연에 내재된 가치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창조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 인간의 손길이 닿아 정돈된 자연은 진품이 아닌 위조품에 불과하다. 복제된 예술품이 제아무리 진품과 비슷해 보인다 해도 그 가치는 결코 진품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오랜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위조품도 진품처럼 여겨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과 숲에 깃들어 살던 과거의 정령들까지 불러올 수 있을까.

왕사스레나무, 개벚지나무, 노거수, 금강제비꽃, 노랑무늬붓꽃…. 생물다양성협약 총회가 열리는 평창 인근 가리왕산에서 올림픽 활강스키장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종들이다. 과학이 자연을 대체할 수 없듯이 ‘사후 복원’으로는 이들을 온전히 되살릴 수 없다. 생물다양성을 정말 지키고 싶다면 이 야만부터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