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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닷속 세상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물고기들의 집으로 고층 아파트를 그린 게 아닌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라온 곳이 늘 아파트였으니, 아이가 ‘집’ 하면 아파트를 떠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야생을 사랑하고 생태적 삶을 지향하면서 막상 아이는 아파트에 가둬 키우다니. 평생을 살아갈 정서의 토대가 유년기에 형성되는데, 삭막한 아파트에서 아이의 유년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도시를 박차고 시골로 간 사람들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봐오던 내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서울에서 먼 지역으로 이사할 일이 생긴 것이다. 불편함도 따르겠지만 ‘기회는 이때다’라고 생각했다. 기왕에 멀리 이사 갈 거면 시골에서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드디어 아이가 자연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겠구나 싶었다. 본격적으로 시골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흙과 나무로 집 짓는 법도 알아보았다. 햇빛으로 전기를 만드는 태양광 발전기가 지붕 위에 얹힌 집은 위시리스트 맨 앞에 있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핵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가 지구와 미래세대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안기는 부도덕한 전기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몇 달간 설레는 마음으로 시골로 이사 갈 준비를 했는데, 뜻밖의 복병이 나타났다. 송전탑이었다. 좀 살 만하다 싶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엔 이미 송전탑이 들어서 있거나, 조만간 들어설 예정이었다. 정작 전기를 펑펑 낭비하는 건 도시와 산업체인데, 핵발전소와 고압 송전선로는 전기도 별로 쓰지 않는 시골에 지어진다. 세계적인 탈핵 흐름과는 정반대로 핵발전소 추가 건설을 밀어붙이는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우리 국토 전체가 송전탑으로 거미줄처럼 뒤엉키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시골 어디를 가도 고압 송전탑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부의 위험천만한 핵에너지 계획 때문에 자연의 품에서 소박하게 살 권리마저 빼앗겨야 하는가 말이다. 밀양, 청도 주민들의 고통이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국전력이 경남 밀양 765㎸ 송전탑 건설공사를 마무리하고 전력선 연결 작업을 벌이고 있는 부북면 일대 126~128호 송전탑 (출처 : 경향DB)


우리 가족은 최선이 아닌 차악을 놓고 선택해야 했다. 고압 송전탑으로 전자파 노출이 우려되지만 자연의 혜택이 남아있는 시골에 살지, 아니면 고압 송전탑은 없지만 미세먼지가 가득한 도시에 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지면에 다 쓰기 어려운 개인적인 사유들도 포함해서 결국 우리는 시골의 꿈을 접고 도시의 아파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이사를 오게 됐다. 이사 후 두 달이 지났다. 그런데 가족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 아이는 전에 없던 비염이 생겨 코가 꽉 막혀 있고, 종일 마른기침을 해댄다. 남편은 발에 습진이 생겼고, 나는 10년 전 완치됐던 아토피가 재발했다. 주변은 전에 살던 곳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소도시 환경이고, 먹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건 오직 집.

나는 이 집이 ‘쓰레기 시멘트’와 ‘방사능 고철’로 지어진 집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수년 동안 시멘트의 진실을 파헤치고 알려온 최병성 목사에 의해 국내 시멘트가 쓰레기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멘트는 석회석으로만 만들어지는 줄로 안다. 시멘트는 소각재, 폐타이어, 하수 슬러지, 공장 슬러지, 온갖 폐기물들을 혼합해 1400도 고온으로 태워 만들어진다. 그 결과, 시멘트는 6가 크롬을 포함한 발암물질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후쿠시마 고철이 하루 100t 이상씩 국내로 들어오고 있다. 이것이 집이 되고 자동차가 되고 학교가 된다. 경기도 한 아파트에서는 무려 1.138μ㏜/h가 넘는 방사능이 검출됐다.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둘레 마을 방사능 수치 1.2μ㏜/h와 거의 같은 수치이다. 우리 가족은 조만간 또 다른 집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갈 곳이 없다. 안전한 집에서 살 권리를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빼앗긴 유랑민 가족이다.


황윤 | 다큐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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