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명출판은 지난 2월24일 창립 20주년 행사를 가졌습니다. 출판사들은 크든 작든 잡화품 가게처럼 다양한 책을 내놓게 마련인데 1600여종을 펴낸 소명출판은 한국문학이라는 외길만 걸었습니다. 국문학자가 소명출판에서 책을 펴내는 것이 영광이라는 분위기여서인지 기념식장에는 유명 국문학자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잔칫집이면 즐겁고 유쾌해야 했지만 박성모 대표의 인사말부터가 무거웠습니다. “출판노동자들이 온당한 예우는 아닐지라도 우리 사회에서 평균적인 대우를 받느냐 하면 대개는 그렇지 못합니다. 20년을 버틴 이른바 한 출판사 대표라는 위치에 있는 저 자신부터 이 출판노동자로서 온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는 말에서 그가 얼마나 힘겹게 이끌어왔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축사를 한 분들도 앞으로 50년 이상 같은 길을 꾸준히 걸으며 장수하라는 덕담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우려의 말을 더 쏟아냈습니다. ‘동아시아 인문학의 구축과 연대’라는 소명출판의 지향점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런 출판사가 살아남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를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의 대부분은 이런 책을 읽는 독자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사전에 소명출판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저는 일본의 30대 평론가인 후지타 나오야의 <신세기 좀비론>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현대는 과도기입니다. 모던으로부터 리퀴드 모더니티의 시대로 이행하고, 주요 미디어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게임 등의 뉴미디어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 마르크스, 다윈의 이념이 영향력을 갖던 시대와는 달리 뇌 과학, 금융 공황, 분자생물학 등의 지식과 그로부터 발생된 세계 인식·자기 인식이 영향력을 갖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이행기 속에서의 ‘인간’ 삶이 겪은 변화와 뒤틀림으로부터 21세기의 좀비 표현에 대한 공감이 높아진 것입니다.”

이 책의 띠지에는 “좀비, 세계가 액상화하는 트럼프 시대의 전조이자 인류 해방의 증명”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자는 이민자나 이슬람교도를 공포의 대상으로서 표상시키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대한 ‘장벽’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한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좀비’로 보고 있었습니다. 미국만이 아닙니다. 터키 등으로부터 몰려오는 난민을 막기 위한 ‘버철 펜스’(감시 카메라, 드론, 생체인증 등을 구사한 장벽)를 구축한다는 구상이 EU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제조업인 무기를 팔러 한국을 다녀간 바 있는 트럼프는 인류 평화의 축제인 평창 올림픽 폐막에 때맞추어 북한의 석유·석탄 무역 등을 차단하기 위해 북한과 중국 등 외국 해운사와 선박에 대해 무더기로 해상 차단이라는 독자적인 제재를 단행하면서 곧바로 제2단계 조치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혀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제2단계가 “매우 거친 내용이고 전 세계에 불행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해 대북 군사옵션 동원 가능성마저 예고했습니다.

우리가 겪는 “불안, 공포, 소외감, 고통, 괴로움” 등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단지 트럼프의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구조에서 벗어날 근본적인 사유를 조금이라도 하고 있을까요? 보수정치인이야 원래 아무 쓸 짝이 없는 종자들이지만 그런 사유를 통해 장기적인 방안을 연구해야 할 대학은 신자유주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석·박사 연구자나 학생들의 머리에 빨대를 꽂아놓고 빨아먹을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큰일이지 않나요? 법정 최저임금이 좀 올랐다고 청소노동자를 앞장서서 해고하거나 저임금의 시간강사나 연구자를 온갖 핑계로 핍박하는 것이 바로 대학입니다.

문학전공의 대학졸업자가 문학적 상상력을 활용할 직장은 과연 얼마나 남았을까요? 글만 써서 먹고사는 작가들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IMF 외환위기 직후에 영화 잡지를 비롯한 문화잡지들이 대거 사라졌습니다. 김영란법을 핑계로 그나마 남아있던 대기업 사보들도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니 기자나 편집자로 살아가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소명출판을 버티게 해준 것에는 학술원이나 문화체육관광부의 ‘우수학술도서’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죽어가는 이에게 산소호흡기를 꽂아준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선정돼 도서관 등에 보급된 책들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근본적인 대책은 무엇일까요? 오랜 시간이 걸려 쓴 논문들을 대강 얽어서 출판사로 보내면서 책으로 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출판사를 죽음의 늪으로 몰아넣는 일입니다. 그러니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을 임팩트가 강한 주제에 대해 풍부한 사례를 예시하며 스토리텔링이 강한 책을 빠르게 써내야만 합니다.

그런 원고를 써낼 수 있는 학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날 저는 세상을 뒤흔들 젊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급진적이고 파괴적이며 강경한 노선으로만 일관하는 트럼프라는 ‘좀비’가 유포하는 공포와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가 세우려는 ‘장벽’부터 무너뜨려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의 ‘공존’을 추구하는 설득력 있는 담론을 되도록 만들어내야 합니다. 현실에 발 딛고 서서 목청껏 외치는 전복의 상상력이 되도록 많이 출현해야 합니다. 그런 상상력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상상력이 담긴 책을 열심히 찾아 읽어주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밝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