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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의 작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성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현남 오빠에게>(다산책방)의 표제작인 조남주의 ‘현남 오빠에게’는 주인공 여성이 10년을 만나며 사랑을 나눈 남자 친구인 현남 오빠의 청혼을 거절하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내내 존댓말로 이어지던 편지는 마지막에서 갑자기 어조가 바뀌며 “오빠가 나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 애정을 빙자해 나를 가두고 제한하고 무시해왔다는 것. 그래서 나를 무능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질타합니다. 그 편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

저는 “이 개자식아!”가 2017년 최고의 ‘어록’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말은 최근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에도 등장합니다. 34회의 마지막에서 흙수저 여자 서지안(신혜선 분)이 집에서 쫓겨나 자신의 주변에서 맴도는 금수저 남자 최도경(박시후 분)에게 당신이 신경 쓰이고 짜증 난다고 말을 하자 “그거 나 좋아한다는 말로 들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서지안은 “어,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몰라? 알잖아…. 그런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이 거지 같은 자식아”라며 사실상 사랑을 고백합니다.

2017년에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을 비롯한 페미니즘 소설들에서 여성 주인공들은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한껏 드러내면서 우리 사회에 일침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놀이 같은 저항’이거나 ‘거리의 투쟁’이거나 ‘가차 없는 결별 선언’이거나 ‘분노의 감정 표출’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런 용기를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너나없이 몰려있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나눠볼 기회가 없었지요. 그러다 2016년 말부터의 촛불광장에서 모든 세대가 여과 없이 분노를 맘껏 표출하면서 대안을 찾자고 목청껏 소리쳤습니다. 그러니 소설 속의 젊은 세대가 나태와 무기력에서 벗어나 인간적 자존감을 추구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이 같은 자기표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아존중’의 원초적 체험은 2018년에도 이어질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출판 트렌드는 10년을 주기로 반복되곤 합니다. ‘IMF 외환위기’라는 세계화의 원초적 체험을 했던 1997년 무렵에도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의 수위가 최고 수위로 높아졌습니다. <나도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의 저자 서갑숙이 즐겼다는 ‘9시간의 정사’가 대표적입니다. 그즈음 <모순>(양귀자)의 주인공은 현실과 몽상 중에서 선택할 여유라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은희경)의 주인공처럼 애인은 적어도 세 명 정도는 두고 반칙의 사랑을 즐기면 그만이었습니다. 개인은 벤처열풍에 휩싸이면서 성공신화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자기계발서는 항우울증 치료제에 불과했습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이었습니다.

이후 자기계발을 통해 아무리 능력을 키워보아도 성공이 말처럼 다가오지 않으니 ‘88만원 세대’가 등장한 2007년 직전부터 ‘성공’을 포기하고 ‘나만의 행복’으로 말을 갈아탔습니다.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마저 엄습하자 개인은 군중에게 지혜를 얻는 개중(個衆)화의 원초적 체험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여주인공은 집안 오빠에게 강간당하고 가족의 도움마저 받지 못한 채 세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합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 사형수를 찾아갑니다. 두 사람은 매주 만나는 세 시간, 목요일 오전 10시~오후 1시까지의 제한된 시간을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개인이 추구하는 행복의 범위를 축소하던 개인은 이명박근혜 정부 9년 동안 내내 ‘셀프힐링’의 깊은 늪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는 단 한 번도 고성장의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대공황이나 다름없는 장기불황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불평등 구조이다 보니 저출산과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습니다. 1000만 관객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는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의 김자홍(차태현 분)은 처자식도 없이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지옥에 끌려갔습니다. 가난으로 저지른 치명적인 원죄 때문에 15년 동안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도 찾아가 보지 못한 채 말입니다. 죽음의 수용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축적의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컵밥과 라면을 먹으면서 돈을 모아 친구와 1박2일의 여행과 맛집 체험을 인생 최고의 행복으로 여길 뿐입니다. 김난도 교수팀은 <트렌드코리아 2018>(미래의창)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확행’을 2018년 최고의 트렌드로 꼽았습니다.

20년 전처럼 무엇을 고를 여유는 없습니다. 그저 온몸으로 달려들어 소리치며 현실을 돌파해야 합니다. ‘개자식’이나 ‘거지 같은 자식’이라는 분노의 욕쯤이야 늘 입에 달고 살아갈 것입니다. 20년 전에는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자신의 반쪽 모습이라도 드러냈지만 이제는 어떤 일에서라도 자신의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 들 것입니다. 아니 그들이 다른 이에게 내줄 자리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자리에서나마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 할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즐기면서 사회적 정의와 개인의 품위를 지켜갈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려는 움직임이 바로 황금개띠해의 최고 트렌드가 될 것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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