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갑자기 겨울이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아직 늦가을이라고 우길 거리가 약간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애매함이 사라진 명백한 겨울이다. 두꺼운 옷가지로 둘러 싸맨 사람들의 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들려온다. “왜 이렇게 추워?” 추위이든, 더위이든 날씨에 대한 반응은 ‘왜’로 시작되는 의문문이다. 이것은 우리 언어문화의 독특한 면 중 하나이다. 영어로는 좀 강조를 한다고 해도 “It’s so cold!” 정도이지, 왜라고 하늘에다 다그치지는 않는다. 모든 국민이 마치 대기과학에 비상한 관심이라도 있는 듯 기상현상의 원인을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이 질문에 답을 구하는 이도, 진짜 질문의 의도를 가지고 내뱉는 이도 없다. 하지만 우리말의 이 버릇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정색하고 ‘왜’를 더 강하게 외쳐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이토록 멀리 와버렸을까? 왜라는 의문사를 적용하고픈 궁극의 질문은 이것이다. 자연 자체로부터 하염없이 멀어졌음은 물론 삶의 모든 구성요소가 자연으로부터 급속히 이탈하고 있다. 네모난 아파트와 사무실을 오가며 눈은 스마트폰 화면에, 귀는 이어폰에 온종일 박힌 무수한 삶이 회색 도시를 배회한다. 엄청난 세기의 냉방이 바로 다음날 엄청난 세기의 난방으로 전환되는 도시의 수많은 공간은 모공마저 다 보일 만큼 밝은 조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난도질에 가까운 가지치기를 당한 가로수 위로는 거대한 간판들이 휘황찬란하다.
포장된 바닥에 간이 헬스장을 둔 곳을 공원이라 부르고, 자연이 차지한 모든 곳을 노는 땅이라 칭한다. 애꿎은 비둘기를 향한 비명이 진동하는 거리에는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만들어진 모피들이 즐비하다. 손님이 떠난 식탁은 잔반으로 가득하고, 종이컵 더미가 카페를 떠나지도 않고 수북이 쌓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빗줄기만큼 비닐 우산이 소비되고, 등산과 야영은 그저 장소를 옮긴 고기판, 술판이다.
법의 보호를 받던 강산은 하루아침에 해제조치되어 개발되고, 지역주민이 자기 고장 갈아엎기에 앞장선다. 자연을 갖고 놀고 소비하고 유린하는 TV 프로그램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모든 지역축제는 ‘축제’라는 단어 앞에 붙은 대상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행사일 뿐이다. 내 몸만 생각하는 소비자는 친환경 제품에는 무관심하며, 나라의 대표기업조차 지속가능한 경영에 투자하지 않는다. 빙산의 일각이다. 목록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멀리, 참으로 멀리 와버렸다.
나라가 자연을 등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연을 등지기 때문이다. 전원 풍경을 머금으며 자란 세대는 줄고 있고, 클릭과 터치로 사는 세대는 늘고 있다. 논두렁과 골목을 탐방하며 자라던 자가, 화면과 게임에 오감을 바치며 성장하고 있다. 자연은 낯설고 불결하고 불편할 뿐인 이들이 대다수인 세상을 향해, 우리 사회는 끈 놓친 풍선처럼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래서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의 저자 리처드 루브는 환경파괴보다 훨씬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아이-자연 연결고리의 파괴를 경고한다. 이를 일컬어 자연결핍장애라고 진단하는 이 용어의 장애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그렇다. 자연과의 단절은 하나의 장애이다.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이 근본적 장애로 인해 언젠가 우리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때가 올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칼럼니스트 조지 몽비오의 말처럼 “자연과의 연결 끈을 잃은 아이들은 결국 자연을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덮고서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깔리고 있었지만 좀 뛰고 싶었다. 번민을 좀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쓰레기 더미 중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아기 고양이이다. 가까이 가자 털을 파르르 세우고 침을 뱉는다. 경계행동이다. 순간 차량 한 대가 고양이 앞을 간신히 지나간다. 저러다 죽겠구나. 하지만 저렇게 사납게 구는데 도와줄 수가 없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곧 닥쳐올 죽음의 암운이 이 싸늘한 길 위에 깔리는 듯했다. 탁탁 발소리 허연 입김. 부스럭 소리에 흠칫 놀란다. 너구리 한 마리가 잠깐 나왔다가 덤불로 뛰어든다. 저 녀석은 과연 괜찮을까. 수세에 몰린 자연을 둘러싼 상념으로 나의 어스름녘 조깅심리는 그리 편안하지가 않다.
길은 둘러 둘러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녀석이 무참히 깔려 식어가는 걸 보게 될 것인가. 휴우. 그때 기둥 너머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야옹아 이리 와! 거기 있으면 다쳐!” 남학생 두 명이 어디선가 박스를 구해 고양이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주저하던 고양이는 상자 안으로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맺힌 눈물에 야경이 아른거렸다. 나는 그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어린 고양이를 구해줘서. 그리고 나의 희망을 구해줘서.
김산하 | 영장류학자
'=====지난 칼럼===== > 김산하의 야생학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 (0) | 2016.01.26 |
---|---|
지구회의와 인류의 새해 각오 (0) | 2015.12.29 |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그러나 하지 않는 나라 (0) | 2015.11.03 |
말하자면, 살아있다는 게 죄 (0) | 2015.10.06 |
생태적 국치일 (0) | 2015.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