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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끝을 향하고 있다. 한 해 동안 펼쳐졌던 세상사의 드라마들은 각각의 줄거리를 모두 전개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부산함과 복잡함, 욕망과 긴장으로 줄곧 들떴던 이곳의 공기에 모처럼 차분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왁자지껄 연말 모임들은 떠들썩하게 밤을 밝히지만 송년의 행위가 끝난 이들의 이완된 눈동자와 어깨에는 고단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지금은 마지막을 기리는 축제 기간이다. 새 일일랑 벌이지 말고 옛일을 봉합하는 데 집중하는 시간이다. 끝을 응시하라. 여기까지 무사히 도달한 여정을 돌아보라. 생존에 안도하고 완주의 기쁨에 동참하라. 계절이 바뀌고 명절도 지나 정녕 새로운 시점이 도래할 때까지 숨고르며 이 말미의 평온함을 음미하라. 한 해가, 다사다난의 또 하나의 덩어리가, 막 떠나고 있다.
바깥 세계는 조용하다. 열두 달이라는 단위체계와 무관한 자연은 이 임의적인 시작과 끝에 반응하지 않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간의 세월을 돌아보는 것도 없다. 그저 어제처럼 오늘을, 운이 좋다면 내일을 살아갈 뿐이다. 신경 써야 할 것은 추워지는 날씨와 그에 따른 대책이다. 동면을 위해 피하지방은 충분히 비축했는지. 겨울깃으로 제대로 털갈이를 했는지. 아무래도 이제 먹이가 부족할 텐데 이 동네에서 과연 식량조달이 잘 될지. 그런데 가만 있자. 생각보다 날이 춥지 않네? 그러고 보니 벌써 몇 년째 이랬던 것 같긴 한데…. 뭔가 이상하다. 자연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다.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 인간 세상의 시시콜콜함과 호들갑으로부터 한때 고귀하게 동떨어져 있었지만, 어느덧 저 직립 영장류 집단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자연.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저쪽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쪽에 대단한 영향을 준단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단다. 우리 모두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이란다.
생각해보면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일이다. 전 세계가 지구를 살리기 위해 모여 ‘지구 회의’를 열고, 어떻게 살릴지 힘을 합치기로 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제협력이나 지역발전 등을 주제로 한 그런 재미없는 회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지구를 함께 구하기로 결정한 엄청난 사건이란 말이다! 파리 기후변화협정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 즉 196개국이 전부 참여해서 도출해낸 인류의 결정이다. 그것도 담당 외교관 수준이 아닌,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급의 나라 지도자들이 직접 나선 사상 최대 규모의 세계 모임인 것이다. 국제정세에 무관심한 자, 또 하나의 무슨 총회일 뿐이겠지 하는 이, 기후변화라면 이제 식상한 사람,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하시는 분. 모두 이번만큼은 달리 봐야 한다. 처음으로 모든 국가가 의무를 지닌다. 잘사는 몇몇 선진국이 알아서 하고 우리는 하던 대로 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부유한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이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하기로 한 초유의 합의다. 게다가 그냥 말로만이 아니다. 법적 구속력을 지닌 결정이다. 앞으로 5년마다 당사국들이 각자의 감축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도 확인한다. 목표치도 과감해졌다. 당초에 배출기준으로 잡았던 산업화 이전 시기 기준 섭씨 2도 상승에서 그 폭을 1.5도로 낮추었다. 좀 더 제대로 줄여보겠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이제는 진짜라는 의지가 반영된, 세계 역사상 최고의 외교적 쾌거가 일어난 것이다. 기후변화협정이 타결된 12월12일은 이제부터 우리의 새로운 희망의 12·12 사태이다.
더 이상의 외면은 있을 수 없다. 우리 일이 아닌 척은 지금 당장 끝내야 한다. 아무리 우리의 청년실업과 국가경제 저성장이 걱정스러워도 그건 우리 사정이다. 그 정도 사정 없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 나라들의 절대다수는 우리보다 훨씬 빈곤하다. 우리보다 어렵게 사는 대부분의 세상을 향해 ‘먹고살기’ 힘들다는 변명을 늘어놓는 파렴치함일랑 집어치워야 한다. 뭐가 어찌 됐든 한국은 경제규모 세계 14위, 탄소배출량은 무려 7위에 달한다. 이렇게 작은 나라가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최고성적 4위를 기록한 것을 그리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 작은 덩치가 배출하고 있는 압도적인 양의 탄소에 함구해서는 안된다. 이 태도는 이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상황은, 말하자면 1997년의 금모으기 운동에서 발휘되었던 전 국민적 노력의 최소한 수십배가 요구되는 시급한 수준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과 국토, 공장과 사무실, 정책과 제도에는 금모으기 노력의 채 100분의 1도 나타나지 않는다.
한 해의 끝자락이 지평선에 걸려 있다. 처음으로 전 세계가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전부 승자거나 전부 패자가 되는 최초의 싸움이다. 서로 싸워서 차지할 땅이나 자원도 아니요, 지켜야 할 국가나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삶과 역사 자체가 역설적으로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초유의 사태이다. 그리고 모든 개인과 모든 집단에 예외없이 역할이 주어지는 역사적 사명의 시간이다. 과거의 습관과 관성은 올해의 남은 하루까지만 그 잔재를 허락하자. 다음날은, 새로운 한 해라는 인위적 단위의 시작은, 진정으로 새 세상을 만들 때에만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실천과 기여의 새해 각오를, 야생학교는 품는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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