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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적인 학습, 토론, 그리고 숙의를 통해 470여명의 시민참여단은 신고리 5·6호기 건설재개와 원전 축소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원탁시민주권의 탄생’이라는 찬사도 있지만, 정부가 결정해야 할 사안에 대해 일반시민들에게 떠넘긴 책임 회피라면서 ‘한바탕 소동’이라고 하는 혹평 역시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합의회의, 시민배심, 공론조사와 같은 숙의민주주의 모델이 서구사회뿐만 아니라 중국, 몽골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선거제도개혁이나 헌법 조항 개정과 같은 중대한 정치 사안에 대해서도 자문 수준을 넘어서는 실질적 권한을 부여받은 시민의회 방식의 숙의민주주의 모델이 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흐름들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좀 더 정치와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촛불혁명을 통해 시민의 직접참여에 대한 욕구가 어느 때보다 팽배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을 계기로 숙의민주주의가 확산될 것으로 기대된다. 

숙의민주주의는 ‘평등한 참여’와 ‘충분한 숙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모든 국민이, 최대한 많은 국민이 참여해 결정에 이르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최소한 전체 국민의 모습을 간직한 축소판으로서 성, 연령, 지역 등을 고려한 ‘작은 공중’을 선정한다면 특정 계층이 아닌 보다 ‘평등한 참여’가 가능할 뿐 아니라 학습, 토론, 심의를 통한 정보 제공과 함께 시간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충분한 숙의’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러한 숙의민주주의를 통한 공론화가 절실한 사안이 무엇이 있을까? 바로 선거제도개혁이다. 이해충돌이나 기득권 챙기기 때문에 정치권 차원에서 제대로 논의되기 어려운 선거제도개혁을 위한 공론화 과정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는 선거제도를 바꾸기 위한 시민총회가 1년 가까이 성공적으로 운용된 바 있다. 시민총회의 구성은 추첨을 통해 선거구별 남녀 한 명씩 158명에 원주민 공동체로부터 2명을 추가하여 모두 160명, 임명된 의장까지 총 161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선거제도 학습, 공청회를 통한 의견수렴, 숙의를 통한 선거제도 권고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작년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 획정조차 여야의 밥그릇 싸움으로 기한을 지키지 못할 정도였는데, 정치판을 뒤흔들 수 있는 선거제도개혁이 과연 다음 국회의원 선거 전까지 가능할까 하는 점에서 회의적이다. 국회 차원에서 추첨을 통해 인구 통계적 대표성을 갖춘 일정 규모의 시민들로 선거제도개혁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학습, 전문가들과의 찬반 토론, 정당 입장 및 시민사회 제안 역시 검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부여하고 홈페이지를 통해 국민들의 의견수렴 역시 충분히 될 수 있도록 한 후 시민대표 간의 숙의를 통해 권고한 내용을 본회의에 부의한다면 국회의 입법권 역시 침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거제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산될 수 있을 것이며 선거제도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아짐으로써 투표 참여에도 보다 적극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이지문 연세대 SS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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