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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한 지 27년 지나갔다. 해방둥이인 나는 70살을 훌쩍 넘었다.

1990년, 19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잠시 일본에 머문 후, 미국에서 한국의 정치범 수감 실태를 증언하고, 정치범 석방과 고문 반대를 호소했다. 옥중 체험을 바탕으로 인권운동가로서의 사회적 자리매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 겨레의 고통의 원인이자 총체라고도 할 수 있는 분단문제가 한시도 마음을 떠나지 않았기에, 서구식 개인주의적 인권개념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다만 통일이 ‘절대 선’이라 할지라도, 무력에 의한 통일은 절대 안되며, 통일은 고통이 없고 기쁨과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과정이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평화에 대한 지향이 싹 텄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니 ‘오키나와 인권협회’와 대만 출소장기수 모임인 ‘대만지구 정치수난인 호조회’로부터 강연 초청을 받았다. 거기서 그들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냉전시대의 분단·군사지배하에서 우리와 같은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서구 제국주의와 일제 침략에 의해 테두리가 그어진 ‘동아시아’라는 정치·역사적인 지역개념을 뒤집고, 빼앗기고 짓밟힌 사람들의 권리를 회복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비서구의 눈으로 서구 제국주의의 범죄 역사를 조명하는 작업은 2001년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반인종주의, 차별철폐’ 세계인권대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대회는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상품화하는 노예제도를 나치의 제노사이드 못지않은 ‘인도에 반하는 범죄’라고 선언했고, 대서양 삼각 노예무역으로 희생된 3000만명의 서아프리카 사람들을 기억하며 500년에 이르는 노예제도의 역사를 단죄하였다. 한 민족을 집단적으로 노예화시키는 식민지 지배도 ‘더반 NGO선언’에 언급되면서,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의 역사적 청산이 21세기 최대의 인권문제로 부상했다. 이것은 바로 ‘동아시아’를 역사적으로 청산하는 과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요즘 세계의 이목은 한반도, 동아시아의 안보위기, 북한 핵·미사일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이나 일본 일각에서 선제공격론이 나왔지만, 전쟁을 야기하는 무력행사는 절대 허용되어선 안된다. 군사적 압력과 제재도 결국 제국주의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패권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역을 노예화하고 침략·지배한 제국주의의 범죄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참된 평화를 실현할 수 없다.

일찍이 서구 제국들은 ‘문명’을 내걸고 ‘야만’을 침략했으며, ‘보편’을 내걸고 ‘불량국가’나 ‘테러국가’, ‘이슬람 세력’ 따위의 딱지를 붙여 ‘특수’를 붕괴시켜 왔다. 이러한 인권·평화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나는 서구 주도의 ‘보편적 인권’이나, 평화의 파괴를 의미하는 아베 총리의 ‘적극적 평화주의’를 거부하고, 동아시아 고유의 정치·역사에 뿌리를 내린 ‘인권·평화’에 눈뜨게 되었다. 1997년 타이베이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냉전과 국가테러리즘’ 국제심포지엄을 시작으로 한국, 대만, 일본, 오키나와 등 동아시아 4개 지역의 냉전시기 국가폭력범죄 청산작업이 이어졌다.

박근혜를 타도하고 출범한 문재인 ‘촛불 정부’의 행보는 스스럼없이 대담하고 국민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다. 현재까지 행보는 결코 어렵고 복잡한 것은 아니다. 권위에 군림하지 아니하고 국민에게 열려 있으며, 현장에서 어려움을 직접 보면서 피해자와 소통하고, 자기 월급으로 자기 밥을 먹고, 사람들이 애창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는 등 ‘상식’이 통하는 ‘보통의 나라’의 간명하고 정직한 실천일 뿐인데 엄청 신선하다.

이런 한국인들의 환희와 대조적으로 일본의 여론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악의와 반감으로 가득 차 있다. 무토 전 주한 일본대사가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좋았다>라는 책을 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문 대통령을 친북·반일의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매도했다. 이런 맹랑한 주장의 배경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에 역사청산을 주문하는 진보세력과 대북 대화 노선을 표방한 문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다. 북한은 무조건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골수 냉전·호전주의자의 오만과 구태에 다름 아니다.

북한이 자기 나라 앞바다에 쏜 미사일을 기화로 도쿄의 전철 운행을 정지시켜서 전쟁 위기를 부추기고 일본의 군사화와 개헌 추진에 악용하는 아베 총리는 지난 5월30일 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한 긴밀한 공조를 하자”고 했다. 압박과 동시에 대화를 내거는 문 대통령에게 아베는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가 없고, 구체적 행동이 필요한 때다. 북한의 시간벌기에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고 주문했다. 일본에서 높은 지지를 받는 아베 총리는 ‘안하무인’ 격으로 외할아버지인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로부터 이어받은 숙원사업인 헌법개악에 착수하려는 참이다.

‘혈육의 정’은 차치하더라도 갈등의 평화적인 해결을 도모하는 한국 정부의 자세는 지극히 당연하다. 대북제재에 앞장서는 일본에는 약자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의기양양한 골목대장의 모습이 겹친다. 게다가 일본은 북한에 대해 여전히 형식상이라도 식민지 지배의 역사청산도 못다 끝낸 전범국가이다. 그럼에도 일본인 납치 사건을 빌미로 피해자연하면서 미국을 등에 업고 적반하장으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하고,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문 대통령의 민족화해정책을 폄하하고 강경 대응하라고 훈계하는 무례를 서슴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지금도 청산되지 않은 동아시아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적 구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촛불혁명을 통하여 ‘주권자 의식’에 눈뜬 촛불민심은 한국이 당당한 주권국가로서 일본의 군사화, 전쟁도발에 제동을 걸고, 한반도 화해·협력·평화 정책에 매진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열렬한 문재인 대통령 팬인 고등학교 2학년 딸은 대선 기간 내내 문 후보를 비방하는 일본에 너무 화가 나서 한 마디 했다.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 코너를 통해서 ‘동아시아’에서 ‘평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독자들과 함께 생각하고자 한다. ‘동서남북인’은 남송의 육유(陸游)가 쓰던 호를 빌린 것이다. 정처 없이 떠도는 자를 일컫는 말인데, ‘타향’인 일본에서 태어나서, 평생 떠돌아온 나에게 맞는 호이기도 하다.

서승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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