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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가 한 번 언 뒤 어김없이 찾아오는, 쩡하기도 하고 매콤하기도 한 날씨를 떠올리매 혜초가 파미르 고원 횡단을 앞두고 쓴 시가 오늘 다시 삼삼합니다(http://theturnofthescrew.khan.kr/33 참조).
햇수로 4년이 걸린 여정... 구법의 길이었고, 난생처음 보는 자연·사회·인종과 만난 길이었고, 그 자연과 사회와 인종이 한순간에 여행자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길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혜초는 인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의 8세기 사정을 아우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고, 이는 5세기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 6세기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뒤를 이으며 자칫 사라질 뻔한 한 시대를 기록해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
앞서 소개한 시까지
해서 모두 다섯 수의 시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 다섯 수는 모두
여행자의 감상을 드러낼 뿐 아니라 여행기 구성의 매듭이 되고 있습니다.
기록 전체는 직필직서의,
담담하다 못해 건조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담담과
건조 사이에서 고개를 든 다섯 수의 시에는 진리를 찾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무릅쓴 사람의 진정이 살아 있습니다.
또한 자연의 위력을
실감한 사람의 정서적 울림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게다가 그 마음속
풍경은 여로의 풍경과 순간적으로 결합해 동아시아 한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살아 있는 현장감을
뽐냅니다.
혜초의 여정과 혜초의 글 앞에서 여러
말이 다 무안합니다.
이제
<왕오천축국전>에 난 길,
혜초 마음속에 난
길을 따라가 볼까요.
원문의 교감에
대해서는 이설이 구구하지만 가장 최근의 업적인 정수일의 교감을 따릅니다.
앞서도
그랬습니다.
[사진_최남선이 교감한 <왕오천축국전> 부분]
[사진_정수일이 역주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焉將鹿苑遼 어찌 녹야원을 멀다 하리
只愁懸路險 그저 근심거리는 험한 벼랑길뿐
非意業風飄 업풍 몰아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八塔誠難見 여덟 탑을 보기란 참으로 어려워라
參差輕劫燒 어지러이 긴 세월 지나며 불타버렸다
何其人願滿 어찌 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까만
目睹在今朝 오늘 아침 내 눈으로 보고 있노라.
지금 혜초는 갠지스 강
유역,
마게타(마가다)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자리인 부다가야(보드가야)의 보리수,
그 보리수를 기념해
지은 절 마하보리사 앞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한참,
오늘날의 네팔까지
가면 또다른 불교 성지,
깨달은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그 깨달음을 설법한 녹야원(사르나트)이 있습니다.
성도成道의 기념물 앞에서 떠올리는 저 너머 첫
설법지.
대륙에서 대륙을 건너
여기까지 온 나그네의 마음...
‘벼랑길 험난함을 걱정할
뿐[只愁懸路險],
업풍이 몰아쳐도
아랑곳하지[非意業風飄]
않는다’는 표현도 현장감을
더합니다.
업풍이란 선연과
악연의 유전을 은유하는 말이기도 하고 지옥에서 부는 폭풍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도의 서원을 세웠으매 나중에 맺힐 업연에
연연할 틈이 없습니다.
이 여정을 뚜벅뚜벅
걸어갈 나그네는 지금은 발밑 벼랑길을 삼가야지요.
다음
생,
저 너머의 세상도
지금 삼가 걷는 내 한 걸음부터라는 결기가 이 시구 덕분에 더욱 또렷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이어
나오는 “여덟 탑”,
곧
“팔탑八塔”은 석가모니의 탄생,
성도,
최초의
설법,
열반 등과 관련한
여덟 군데 대표 성지의 기념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시에 나온 것처럼
세월이 지나면서 폐허가 된 곳도 있었고요.
마하보리사도 말하자면 이 팔탑 안에
듭니다만,
제 눈으로 이를 보게
될 줄을 혜초 자신으로서도 어찌 알았겠어요.
업풍 아랑곳하지
않고,
발길
삼가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은 결과 아니겠어요.
그렇게 가고 또 가 남천축에
이르러,
혜초는 다시
노래합니다.
浮雲颯颯歸 뜬 구름 휙휙 지나간다
緘書忝去便 편지를 삼가 그 편에 부치려 하나
風急不聽廻 바람이 급해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돌아오지 않는구나
我國天岸北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
他邦地角西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
日南無有雁 일남에는 기러기도 없으니
誰爲向林飛 누가 나를 위해 상림원上林園으로 날아갈까
“첨瞻”은 시선을 멀리 두는
행위입니다.
어느
날,
인도 대륙의 한참
내륙에서,
혜초는 고향길을 바라
저 멀리로 시선을 두었겠죠.
마침 그때 달빛 아래로 뜬 구름이 휙휙
지나갑니다.
“삽삽颯颯”은 한국어 “휙휙”쯤에 상당하는 의성어로 무언가가 질주하듯
빠르게 지나가는 모양을 나타냅니다.
구름은 지나가고[“귀歸”에는 “돌아가다”뿐 아니라 “가다”의 뜻도 있어요],
공손하게[忝]
‘가는 길에 내 편지
좀 부쳐 다오’
해보지만,
바람이 워낙 삽삽이
구름을 몰아가는지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구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내 나라...
“아국我國”...
여기서는
문명,
대륙 단위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뒤 시구와
앞으로 볼 나머지 시 두 편이 제대로 풀립니다.
허턱
‘신라’라고 할 수 없는 대목인데 차차
풀어보겠습니다.
일남은 옛 지지를 곧이곧대로 따라 베트남
중부,
꽝트리·꽝남·꽝나이·빈딘 일대라고 해도
좋고[그곳만큼 머나먼 남쪽이라는
뜻],
아니면
“해 뜨거운 남쪽”이나 위 “땅 끝 서쪽[地角西]”에 물려 “해 뜨는 남쪽”이라고 새겨도 좋습니다.
어느 편이나
북,
서,
남의 대비가 나그네의
발걸음을 잘 드러냅니다.
끝으로 “誰爲向林飛”입니다.
“내
나라[我國]”를 떠올리시며
보시겠어요?
“수誰”는 “who”
“whom”의 의미와
역할을 두루 간직한 의문사입니다.
“림林”은 여기서 “상림원上林園”입니다.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사신 갔던 소무蘇武는 붙들려 오지로 추방된 상태에서
억류되었습니다.
소무는 어느 날
기러기 다리에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편지를 기러기 발에 묶어 날렸는데 이 기러기가 마침 장안 궁실의 뜰인 상림원에서 잡혀 그 편지가 한나라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바뀌어 소제
때였습니다.
소무의 소식을 알게
된 소제는 흉노에 사신을 보내 소무를 귀환시켰습니다.
19년 만의
귀환이었습니다.
이것이 전고典故라는 한문학의
수사법입니다.
“기러기”가 하필 언급되면서부터 소무의 고사가
작동합니다.
그러고는 고향에서
이격된 신세-기러기와 편지-돌아갈 곳과 상림원-향수 들이 꽉 찬 원을 그리게
됩니다.
고병익,
이석호,
정수일 등 많은 분이
“림林”을 바로 “계림鷄林”,
곧 신라로 풀었지만
그럴 만한 전거도 그럴 만한 고사도 없습니다.
전거典據에 기댈 때,
고사故事에 기댈 때에 작동하는 수사법이
전고입니다.
“림林”
곧
“상림원上林園”으로 새길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흐름,
그리고 문명과
문명,
대륙과 대륙을 오가던
나그네의 상상력의 그릇을 아울러 살펴보면 어떨까요.
[사진_이석호가 교감한 <왕오천축국전> 부분]
이번에 보실 시는 북천축의 한 절에서 숨을
거둔 중국인 스님의 사연을 듣고 쓴 것입니다.
하필 고향으로 가는
길에 덜컥 병이 나 머나먼 땅에서 숨을 거둔 중국인 스님의 사연이 너무나도 슬퍼서 쓴 시입니다.
他方寶樹摧 타향의 보배로운 나무는 꺾였구나
神靈去何處 신성한 혼령은 어디로 갔는가
玉貌已成灰 옥 같은 모습은 이미 재가 되고 말았네
憶想哀情切 생각하니 가엾고 절통해라
悲君願不隨 그대 소원 이루지 못했음을 슬퍼하노라
孰知鄕國路 누가 고향 가는 길을 알까
空見白雲歸 덧없이 바라보느니, 흰구름 지나는구나
두말이 필요 없는 직설로
표현한,
한 문명과 한 대륙
사람에게 느끼는 동감과 동정이 이러합니다.
나 또한 가는 길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를 위해 추도사 한
마디 해 줄 같은 문명,
같은 대륙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 “생각하니
가엾고 절통해라”는 말은 시인이 시인에게 주는 말로도
들립니다.
이제 여정의 끄트머리로 달려가는 길에
쓴,
혜초가 남긴 다섯 수
가운데 네 번째 시이고,
현존
<왕오천축국전>
마지막 시 바로 앞에
자리한 시입니다.
余嗟東路長 나는 동쪽 길이 멀다고 탄식하노라
道荒宏雪嶺 길은 험하고 산마루는 어마어마한 눈을 이고 있는데
險澗賊途倡 험한 골짜기로는 도적떼가 길을 트는구나
鳥飛驚峭嶷 날던 새는 가파른 산에 놀라고
人去偏樑難 사람은 기우뚱한 다리 건너기가 어려워라
平生不捫淚 평생 눈물 훔친 적 없었다만
今日灑千行 오늘만큼은 천 줄기 눈물을 뿌리노라
여기는 오늘날의 토카리스탄과 와칸
사이.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이 바라보이는 곳입니다.
여기서 동진해 파미르
고원을 넘으면 드디어 당제국의 경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데서 만난 당제국의 사신은 서쪽 길이
멀기만 합니다.
혜초랑은 가는 길이
정반대가 됐네요.
“險澗賊途倡”의 표현이 절묘합니다.
“창倡”은 “인도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지나온
걸음을 셈하든 가야 할 걸음을 셈하든 멀기만 한 이곳 골짜기가 “무법자들이 선두가 되어 길을
낼”
정도로 험한 곳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험한 길에 무법자들이 출몰하고, 하는 느낌이 참 잘 살아 있습니다.
“人去偏樑難”의 현장감도 생생합니다.
날던 새가 놀라도록
험하고 가파른 산지에 놓인 다리이니 기우뚱하기도 할 테고,
새가 놀랄 만한 데에
위태하게 걸린 다리를 지나는 사람의 마음은 또 어떻겠어요.
그나마 한 문명,
한 대륙 사람을 만나
눈물이라도 후련하게 뿌렸으니 그 눈물바람의 정화가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겠지요.
이렇게 해서,
또 앞서 보신
http://theturnofthescrew.khan.kr/33 까지 해서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에 남긴 시 다섯 수를 모두
보셨습니다.
목숨을 건 여행길에서 이런 노래를 남긴
혜초는 그 뒤 당제국의 수도 장안에 머물며 밀교 연구와 밀교 경전 한역에 힘쓰다 오늘날 중국 4대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대산의
건원보리사로 들어갔고,
거기서 공부하다가
생을 마칩니다.
신라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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